신약 말씀 나눔

[스크랩] 사회적 변화를 위한 초기 기독교 전략 (고전 11:3-7, 13-15) 2015년 5월 31일

J_카타리나 2015. 6. 1.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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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령 든 기독교

 

오늘날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그것이 제대로 된 기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각자의 위치에 따라 그것이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그 내용들을 취합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각각의 사람들이 바라보는 각도가 다르고 심지어는 상반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것을 취합할 수 없고 나아가 혼란만을 초래하기 때문에 가뜩이나 망령이 든 기독교가 더더욱 파멸을 향해 가속도가 붙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 7:12) 라고 말씀하셨고, 기독교는 이 말씀에 '황금률'이라는 이름까지 붙여 기독교가 타종교보다 우월함을 과시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황금률이라고 이름 붙였던 예수님의 이 말씀은 기독교 안에서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장되어 깊히 묻히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필요할 때 가끔은 이 말씀을 꺼내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이 말씀을 사용하는 방식은 이 말씀이 말하는 내용과 아전인수 격으로 정 반대인 경우이거나 그저 '립서비스'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자신들이 이름 붙인 대로 금과 옥조로 여긴다면 오늘날 기독교가 이처럼 망조가 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끊임없이 힘과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들에게는 영원히 근본적인 해독제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독을 품은 존재들입니다. 본능적으로 인간은 다른 사람들을 좌지우지하고 싶은 욕망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또한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가 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지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운명적인 만남이며 관계입니다. 황금률은 바로 그런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를 무력화시킴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새로운 인류를 만드는 하나님의 처방인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안 어디를 둘러보아도 자기를 생각하고 상대방을 생각하여 상대방의 원하는 바를 대접하고자 하는 사람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툼과 갈라짐은 이미 그 안에 잉태된 상태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상태로는 결코 복음을 살 수는 없습니다. 복음을 살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이 될 수 없는 것 또한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독교는 오랜 중병이 든 환자처럼 망령이 들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런 상태로는 결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는 전혀 다른 사회를 꿈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도날드 크레이빌은 그 나라를 영어로 'Up side down Kingdom'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도치된 나라', 혹은 '위아래가 뒤집힌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그렇게 부르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삶이 세상의 방식과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변화를 추구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그가 어디에 있건 그가 속해 있는 문화와 세상 질서에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제사문제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개신교의 경우는 그래서 제사를 금지하고, 가톨릭의 경우는 허용하되 제한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중적인 삶을 살거나 믿지 않는 형제들과 갈등을 빚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만 한국의 그리스도인들만 직면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후, 기독교가 들어간 모든 곳에서 벌어지게 되는 사회적 마찰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누구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깊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르게 사는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역행하여 그렇게 사는 방식은 그가 속해 있는 사회와 경우에 따라서 유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근본적으로 세상의 변화를 위한 하나님 나라의 요구를 묵살하거나 우선순위에서 뒤에 놓여서는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사회적 변화를 이룰 것인가에 대한 깊은 이해는 단순히 마찰을 피하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망령이 든 우리 시대의 기독교에 복음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숨결를 불어넣는 계기가 될 것이며, 결과적으로 사회적 변화를 이루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복음의 회복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 그것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동등함을 받아들이기

 

오늘의 본문은 그동안 여성에 대한 차별의 도구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누구라도 이 본문만을 읽는다면 분명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고 종속적이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일관성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분명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3:28)라는 놀라운 선언을 하였습니다. 사실 바울의 이 선언에 담겨있는 의미는 거의 파격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당시 사회에 충격을 주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모든 사회적 장벽을 철폐하셨기 때문에 바울의 이 선언은 내용상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인간은 도무지 동등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누구나 겉으로는 동등한 것이 좋다고 말하고 복음이 동등함을 선언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 나라의 대 원칙 가운데 하나인 동등함이 실현되고 있는 곳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과 마찬가지의 차별이 엄연히 존재하다 보니 이제는 복음이 모든 사람의 동등함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생경한 것이 되어버리거나 동등함이라는 거의 개념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이 편지에서 그들에게 말하려던 것은 무엇이었으며, 2천 년이라는 시공을 넘어 우리에게 전해진 이 본문을 보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혹은 할 수 있는 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것을 사회적 성경적 정황 안에서 이해함으로써 본문의 주된 요점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사회적 변화를 위한 초기 기독교 전략"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그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들었던 설교나 이 본문에 대한 해석이 그 본래의 정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많은 해석자들이 본문에 잘못된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그들은 왜 질문이 있었는지를 설명하지 않고 바울의 대답을 논의합니다. 모든 답은 그 질문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런 논쟁을 이해하기 전에 왜 변화가 제시되어왔는가를 알아야만 합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문화의 관습을 다룰 때 특별히 더 그렇습니다. 고린도의 여인들이 왜 베일을 벗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는지를, 그들이 왜 그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먼저 파악해야 바울이 본문을 답으로 제시한 이유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의 새로운 질서

 

대부분의 경우 초기 교회는 불공정하고 박해를 받는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사회적 희생자의 운동이었습니다. 노예제도가 일을 위한 일반적인 방식이었던 상황 속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노예들이었습니다. 공정한 임금을 받는 독립적인 고용자의 개념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초기 신자들의 대부분은 주로 이교도의 세상에서 두드러졌던 유대인들이었다. 로마의 실행방법을 이해하는 로마의 시민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회의 밑바닥으로부터 모인 그 사람들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로부터 하나님이 일들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인간관계의 총체적인 새로운 질서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강력한 것이 될 것이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나라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선지자들은 이와 같은 일들에 대해 말해왔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세례 요한이 와서 기다림의 시간이 끝났다고 선언했고 한 사람이 이 나라를 가져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와서 “더 이상 기다리지 말라! 내가 여기에 있고, 이것이 그것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도 바울은 “예수가 오셨고, 예수가 일어나셨고, 이제 그가 하늘에서 통치하신다. 이것이 그것이다.”라고 말하며 고린도로 갔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존중을 받을 수 있는 인간관계의 새로운 질서 속으로 안내하셨습니다. 이 새로운 질서 속에서는 더 이상 유대인과 이방인, 야만인과 문화인, 남성과 여성, 주인과 노예 사이의 차별이 없습니다. 만일 바울이 오늘날 고린도서를 기록한다면, 그는 부자와 가난한 자, 흑인과 백인, 내국인과 외국인 노동자들을 이 목록에 더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평등함이 온 세상에 아직 정착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그것이 기독교 교회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어느 날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노예는 주인과 같이 자유로웠습니다. 교회 안에서 유대인은 이방인보다 잘 살지 않았습니다. 교회 안에서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존중받을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사회 변화를 위한 전략

 

고린도의 여인들은 이제 예수님의 그 새로운 질서 속에 편입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자기들을 구속하던 머리 가리개를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럽게 고린도의 여인들은 그렇다면 이제 머리 가리개를 벗어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 머리 가리개를 벗음으로써 우리가 갖게 된 자유와 새로운 질서를 온 천하에 보일 수 있지 않은가? 그들은 자연스럽게 그런 질문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 여인들의 동기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회중 안에서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거나 지체의 삶을 공유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그는 그들이 계속 기도하고, 예언할 것을 기대하고 그리고 그 이외의 집회에 참석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여인들에게 그들의 의상에 머리 가리개를 더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미 공식적으로 머리 가리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예배 중에 기도를 위하여 고안된 의식적 상징물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단지 이 여인들에게 그들이 이미 착용하고 있던 것을 그대로 착용하고 있으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표준적인 관습이 아니었다면, 그는 14-15절에서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고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머리 가리개는 여성들이 익숙하게 입었던 그 무엇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본문을 통해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간단히 말해서, 그는 교회는 베일에 의해 대표되는 사회적 질서를 노골적으로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매우 가시적인 대중적 상징들을 성급하게 변화시키기 전에 숙고해야 했습니다. 사회에 대한 기독교 믿음의 영향은 이미 충분히 지대했기 때문에 신자들은 존재하고 있는 질서들의 유명한 상징들에 직접적으로 도전함으로써 과도하게 부정적인 주목을 끌지 말아야 했습니다.

 

이 추론을 좀 더 자세히 시험해보겠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머리를 가려야하는 이유들이 타당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성에 호소하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그것은 로마인들의 세상의 지배적인 사회적 관습을 의미했습니다. 우선 바울이 왜 그와 같이 문제가 있는 사회적 관습들을 존중하려고 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왜 어떤 특별한 문화는 여성들을 차별하는 것을 유지하려는가?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하다는 갈라디아서 3:28절에서의 자신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는가? 그는 일관성이 없거나 깊이가 없는 사람이었는가?'와 같은 질문들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말이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이 교회를 고린도 안에 세웠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만일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이 성, 민족, 그리고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의 동등함에 대해 확신했다면, 그것은 그들이 바울로부터 그것을 배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처음부터, 바울은 서로를 동등하게 여기는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교회 안으로 그들을 적응시켰습니다. 처음부터, 그들의 유명한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브리스길라는 여성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곳에서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다는 그의 비전을 적용하는 것이지 부인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것은 비록 복음이 변화를 만들지만, 진정한 복음의 변화는 단순하게 현재의 상황에 충격을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현재의 상황 안에서 개인적 실재와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같은 접근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을 갈라디아서 3:28에서 그가 성별 그룹들과 함께 말했던 다른 사회적 문제들과 관련된 바울의 전략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바울은 반복적으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기독교 교회 안에서 화해되었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1세기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로마 사회 안에서 다른 법에 속해있었고 때론 다른 법정에 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유대 법정으로 가고, 유대교를 단념하거나 그들의 이름을 바꾸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또 이방인들에게 전통적으로 유대교로 개종하기 위해 남겨두었던 의식을 통해 먼저 유대인이 되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으로 남고, 이방인들에게 이방인으로 있을 것을 격려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가족으로서 함께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교회 안에서 주인들은 노예들을 가족처럼 대했습니다. 그들의 모임 밖에서조차, 주인들은 노예들을 친척처럼 대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믿는 노예들을 위해 어떤 새로운 법적 지위를 고안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려는 것은 책임이 있는 주인을 섬기면서 잘 살고 있었던 많은 노예들에게 문제를 악화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노예제도를 불법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내전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해 그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역사의 심각한 교전은 우리에게 내전을 통한 단순한 노예제도의 폐지는 노예들에게 반드시 즉각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신중함과 인내의 필요성

 

바울의 사회적 변화에 대한 접근은 아마도 초기 교회와 로마제국 사이의 복잡한 관계의 배경에 대한 가장 좋은 이해였습니다. 초기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에 대한 숭배를 멈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원하듯이, 황제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았습니다. 로마에서도, 바울은 그들이 그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지 말 것을 확신시켜야만 했습니다. 세상에 순응하지 말 것을 그들에게 가르친 후에, 바울은 “사람은 누구나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 (롬13:1)라고 말했습니다. 복음이 가져온 변화들은 즉각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 전체를 개혁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이 구절의 요점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즉각적인 변화는 존재하는 더 큰 문제들과 함께 일하는 우리의 방식을 수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져오기 원하는 큰 변화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을 회피하기 위한 많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 한 이유는 부정적인 반발을 피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변화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만일 패배자들이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거대한 변화를 선포하고자 한다면, 그들은 사실은 그들에 대항하는 압제자들과 단결해야 합니다. 또 다른 이유는 한 번 패배자들이 권력 있는 지위를 성공적으로 획득하면, 그들은 권력을 휘두르던 사람들과 같이 종종 똑같은 악습의 희생자로 전락합니다. 패배자가 큰 변화들을 선포하면 할수록, 패배자는 진정한 변화를 위한 오랜 기간의 투쟁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들기를 원하는 변화에 대해 주의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방식과 관련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하게 하시지만 책임지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건 그건 끝이 아닙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더해집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결과가 어떤 일단락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 사역의 어떤 한 부분을 이루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그 방식은 근본적으로 세상의 방식과  다릅니다. 정부와 같은 세상의 방식은 힘에 의한 지배 의해 어떤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힘이 아니라 사랑의 섬김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들 안에서는 세상의 방식이 통용될 수 없다고 분명히 선을 그으셨습니다. (막 10:43)

 

하지만 우리는 노골적으로 불순종하기 위한 기회들을 찾거나 정부를 모독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정부에 대항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우리의 국가에 대한 복종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로 제한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아가 정부가 설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정부를 쓰러뜨리고, 대체하고, 혹은 빼앗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정부를 그대로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들이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그들의 원수들과 범죄자들을 파멸시키지 않는 세상을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이 현존하는 질서를 정면으로 공격했다면, 그들은 호전적인 혁명 운동조직이라는 의심을 받았을 것이고, 그들은 대립의 역풍이라는 위협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취급은 악화되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의미에서,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한 변화를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그들이 정말 신뢰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심이 일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선의 도구로 만드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해야 합니다.

 

다시 머리 가리개로

 

이제 다시 우리의 현재와 관련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머리를 가리는 것의 의미는 단순합니다. 그것은 여성들이 대중 앞에 나타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요점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여전히 타당한 관습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준수해야 하는지, 어떤 환경 하에서 머리 가리개를 하지 않고 같은 것이 성취될 수 있는지 논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여인들에게 그들의 머리를 가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는 단지 그 문화에서 정숙한 여성들이 대중 앞에서 썼던 일상적인 베일을 벗어버림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이 새롭게 발견한 자유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의해 그 사회의 규범을 공격하지 말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여성들은 공개적으로 그들의 가리개를 하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모든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고 아마도 그들이 그들의 교회들이 모이는 집들을 떠날 때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모두 정숙한 여성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만 그것을 벗는 것은 공적인 전시, 혹은 그들의 사회에 대한 비전 안에서의 변화를 의식적으로 보여주는 일종의 퍼포먼스가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왜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의 설교 제목을 '사회적 변화를 위한 초기 교회의 전략'이라고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가르침

 

이 구절이 쓰였던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안에서만 명시적으로 그것들을 진술한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사회적 성서적 정황 안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만 없어도, 우리는 이 구절을 가질 수 없고 바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간관계들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질서를 가져왔다는 초기 교회의 강력한 확신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주인과 노예, 흑인과 백인, 부자와 가난한 자, 부모와 자녀, 남자와 여자 사이의 모든 관계들은 짓밟히는 사람들에게 권위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새로운 질서와 소통하고, 그것에 대한 증인을 낳고, 그것을 각색하고, 그리고 상징적으로 현존하는 질서를 거절함에 의해 그것을 선포하고 싶은 강렬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이 이 새로운 관계들을 실제로 볼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고린도에 있는 여성들이 이 새로운 실재를 선포하기 원하지 않았다면, 그 편지는 그렇게 쓰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구절 뒤에 있는 마지막 이유는 예수의 의미에 헌신적이었던 성숙한 기독교 지도자의 결정이었습니다. 그는 앞의 두 가지 이유에 동의하고 상징적으로 베일을 벗는 것을 통해 그 나라의 새로움을 각색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참을성이 없고, 그리고 헛된 것이 될 것이라고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성들에게 다른 대중적 모임에서와 같이 예배 시 베일을 한 채로 있으라고 가르쳤습니다.

 

만일 오늘날 우리가 듣고 있는 설교의 내용처럼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여성들에 대한 차별의 정당화를 위한 것이었다면 고린도의 여인들은 교회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복음은 해방의 기쁜 소식이 아니라 차별과 구속의 나쁜 소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만일 고린도의 여인들이 머리 가리개를 벗어던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를 온 세상에 표출했다면 고린도교회는 고린도로부터 퇴출되었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고린도 지역의 복음화를 포기해야 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여러분!

 

귀 있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오늘 내용은 많은 잘못된 기독교의 관행들을 바로잡는데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옳음에 절대성을 부여하고 끊임없이 갈라지고 편을 가르고 힘과 영향력으로 사회를 장악하려 하는 오늘날의 교리중심의 신앙에서 벗어나 상대를 존중하는 가운데 복음이 가지고 있는 실재 자유와 기쁨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그런 사람들이 된다면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통해 더 많이 일하실 것입니다. 꾸준하게 그리고 말없이 복음이 선포한 동등함을  실재 삶으로 살아내는 우리들 주변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출처 : ♡어지니♡
글쓴이 : 늘 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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