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신앙글)

[스크랩] 더 큰 악 (욘 4:1-11) 2015년 5월 10일

J_카타리나 2015. 5. 11. 09:29
728x90

인간과 폐쇄성

 

한 승려의 글에서 이런 내용을 보았습니다.

 

항상 가장 낮은 자리를 가지세요.

옷은 소박하게 입으세요.

할 수 있는 만큼 남들을 도우세요.

무엇을 하든 사랑과 자비를  기르세요.

확실히 우리의 일부가 될때까지요.

-빠뚤 린포체

 

마치 예수님의 말씀이나 바울 서신서의 '그러므로'라는 말 다음에 이어지는 권고의 말씀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신기할 정도로 똑같습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내용을 읽고도 그것이 복음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승려의 글이라는 사실 때문에 처음부터 읽으려 하지 않거나, 읽고도 아무리 그래도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의 쓸데 없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의 철저한 폐쇄성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폐쇄성이야말로 모든 화근의 근본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복음의 특징은 개방성입니다. 모두에게 열려 있고, 심지어 모든 피조세계에까지 열려 있는 것이 복음입니다. 하지만 그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살아야 하는 인간이 그 복음의 개방성을 모두 닫아버립니다. 그러면 복음은 복음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볼 수 있는 모든 불행들은 바로 복음의 개방성을 막아버린 인간의 폐쇄성이 낳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폐쇄적인 존재입니다. 인간과 이기심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분리되지 않은 인간의 이기심은 모든 것을 닫고 여는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열릴 수 있지만 우리라는 말을 붙일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지혜와 지식은 페쇄성을 그 기반으로 합니다. 그래서 자기 가족, 자기 교회, 자기 나라, 그리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약간의 사람들만이 설정해 놓은 울타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때로 사람들은 자신은 그래도 남에게 일부러 해악을 가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내세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존재라는 것, 모든 피조물이 근본적으로 연결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이미 그는 일부러 해악을 가하는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들이 '우리 교회'가 되어 그 몸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옳다는 주장, 우리가 정통이라는 주장이 그리스도의 몸에 분열을 일으키고, 나아가 모든 이단들의 발판을 기독교 안에 만드는 것입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라는 나눔이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일하려는 복음의 목표를 가로 막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폐쇄성이 복음 자체를 변화시켜 인간 중심의 기독교, 폭력적인 기독교, 탐욕의 종교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폐쇄성은 근본적으로 복음이 말하는 사랑의 속성과는 반대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람이 폐쇄적이라는 말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열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소자들을 향하여 다가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을 향해 우리를 열어가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며, 근본적인 폐쇄성을 가진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구원의 길을 걷는 새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묵상할 요나서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귀중한 책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도 오늘날 기독교와 같이 지독한 폐쇄성을 가진 종교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열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요나를 선택하셔서 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의 자의식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택하실 정도로 신실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요나를 통해 이스라엘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폐쇄성이었습니다. 그 폐쇄성이 선민이라는 자의식을 강화시켰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우월감이 다른 세상 사람들을 열등한 사람들로 만듦으로써 그들에게 해악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안으로 들어가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고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은혜가 이 자리에 임하기를 바랍니다.  

 

배경과 구조 

 

요나서에는 요나의 활동시기를 알려주는 실제적인 표시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요나의 활동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요나서는 다른 문서 선지서와는 전혀 다른 책입니다. 요나서는 예언의 말씀을 모은 책이 아닙니다. 요나서에서 요나가 대변한 하나님의 말씀은 3:4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다섯 개의 히브리어 단어로 구성된 이 한 구절밖에 없습니다. 요나서는 요나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요나에 관한 이야기가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요나서는 문제투성이인 선지자 요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요나서를 읽을 때 우리는 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4장에 걸쳐 기록된 그의 행적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요나는 당시 이스라엘 편에서 보자면 악의 대명사이자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땅으로 간주되었던 앗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 성읍에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소명의 자리, 즉 동쪽에 위치한 니느웨를 등지고 하나님의 눈을 피할 목적으로 서쪽 끝에 자리한 오늘날의 스페인 지역에 있는 다시스로 도망을 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요한 추적으로 요나의 그 도피행각은 실패로 돌아갑니다.(1장) 결국 그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큰 물고기에 삼켜져 그 속에서 3일간 갇혀 있다가 육지로 토해집니다.(2장)

 

할 수 없이 요나는 하나님의 두 번째 명령에 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서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합니다. 사실 요나는 이스라엘의 철천지원수인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가 하나님의 전하라는 그 예언을 못 듣고 멸망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니느웨 성읍 중심이 아닌 한적한 변두리에 다다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우려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심판에 관한 예언을 듣고 왕으로부터 백성까지, 심지어 짐승들까지도 회개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진정한 회개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심판 결정을 철회하셨습니다.

 

그러자 요나는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단순한 불만 정도가 아니라 참고 참았던 불만이 한꺼번에 폭발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요나의 분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이제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더 큰 악 (1-3)

 

본문 1-3절은 요나의 분노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1절은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입니다. 이 구절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랬더니 그것이 요나에게 아주 악한 것이 큰 악이 되었다."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니느웨의 회개를 받으시고 요나에게 주셧던 예언의 말씀에 있던 심판을 철회하시자 그것을 심히 싫어하고 노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요나에게 "큰 악"이 되었습니다.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가 요나를 더 큰 악에 빠지게 했다는 말입니다.

 

요나서 1:2절을 보면 니느웨는 "단순한 악독"으로 읽을 수 있는 '라아'로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니느웨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판결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고 결과적으로 그는 이보다 더 "큰 악"이라는 의미의 '라아 그돌라'에 빠졌습니다. 니느웨는 하나님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함으로 용서를 받았지만 요나는 하나님께 도전함으로써 더 큰 죄인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습니다.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가 요나에게는 더 큰 악을 가져다준 것입니다.

 

제가 전에도 몇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 어떤 목사의 설교 내용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내용입니다. 오래 전에 인도네시아에 닥친 쓰나미를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해석하고, 뉴올리언즈에 닥친 카트리나 허리케인을 그곳이 동성애자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그곳을 쓸어버리시려는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했던 목사의 말이 바로 요나의 태도와 같은 것입니다. 그 목사는 아마  이번 네팔 대지진 참사도 그런 식으로 설교의 자료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모습, 즉 믿지 않는 사람들의 불행을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라 좋아하는 태도가 바로 더 큰 악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같은 태도는 기독교 안에 이미 만연되어 있던 일이었습니다. 한국 기독교 안에 상식처럼 되어버린 사실은, 예수 믿으면 잘 살고, 안 믿으면 못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주로 믿고 있는 동남아시아가 그렇게 못 살고, 남미가 믿음 때문이 아니라 금을 찾아 갔던 땅이기 때문에 그렇게 못산다는 식의 해석이 완전히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설교학 시간에 기말 시험은 수업시간에 나와 설교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전도사가 불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똑같은 땅인데 북한은 흉년이 들고 남한은 풍년이 들었다는 식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흉년의 원인은 믿음이 없는 땅이기 때문이라는 사고였습니다. 그러자 설교학 교수는 매우 좋은 통찰이라고 좋아라하던 모습을 저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관점은 인간의 관점이고, 그것도 아주 수준이 낮은 유치한 인간의 관점입니다. 그와 같은 사고와 관점은 지금 요나에게서 보듯이 더 큰 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요나에게서 타락한 실패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2절과 3절은 그가 화가 났던 이유를 알려줍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는 니느웨에게 마땅히 임해야 할 무서운 심판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 때문에 지연되거나 철회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나의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지식, 혹은 신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는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정의가(심판이)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결과적으로 니느웨에 대한 심판의 철회는 요나를 신앙적 딜레마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서운함과 배신감으로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차라리 자신을 죽여 달라는 극단적인 간청을 드립니다. 그는 심한 자괴감에 빠져 하나님께 반항하며 죽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요나의 기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기도에는 니느웨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반면 그 기도 안에는 '나'라는 표현이 무려 9번이나 표현되고 있습니다. 요나는 지금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사고로 모든 것을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기 자신에게만 극단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요나의 모습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요나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갖는 이 인간의 닫힌 사고야말로 그 어떤 세상의 악보다 더 큰 악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예를 들어 풀어서 설명하자면, 이번 네팔과 같은 믿지 않는 지역의 대지진 참사를 보고 그들이 다른 종교를 믿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런 참사가 일어났고,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며, 그렇지 않은 곳에 살고 있는 자신에 대해 감사하는 일이야말로 그곳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일 보다도 더 악한 일이라는 것을 요나서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요나를 추적하시는 하나님 (4-9)

 

이제 요나서에서 하나님이 씨름하고 있는 상대는 더 이상 니느웨가 아닙니다. 이제 니느웨의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문제는 요나입니다. 실제로 요나는 이방인들보다 훨씬 더 하나님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을 거십니다. 하나님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는 요나를 먼저 찾아가십니다. 하지만 요나는 그런 하나님을 외면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자리를 옮겨 니느웨 성 밖으로 나갑니다. 그는 혹여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셔서 니느웨 성을 멸하기를 기다리며 일종의 텐트 농성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요나에게 아무런 말씀도 안 하시고 요나가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조용히 함께 하십니다. 이 사실 또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하나님은 대부분 침묵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때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무언의 대화가 오가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요나가 더 큰 악에 빠져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위해 어떤 수고도 아끼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요나가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다양한 학습 자료들을 준비하십니다. 이미 요나를 위해 큰 물고기를 준비하셨던 것처럼, 이번에는 박 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그 박 넝쿨이 그늘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자라게 하십니다. 그런 후에 벌레를 한 마리 준비하셔서 그것을 갉아먹어 죽게 하시고, 뜨거운 동풍을 보내 시들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박 넝쿨의 그늘로 인해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그 박넝쿨이 시들자 실망하고, 뜨거운 해가 그의 머리에 비치자 그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중얼거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요나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이 말씀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요나를 그의 악에서 빼어 오려고"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보다 더 큰 악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를 그 큰 악 속에서 다시 구출해내시려고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선사하신 박 넝쿨이 주는 그늘로 인해 요나는 '심히 기뻐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나가 빠진 '큰 악, 라아 그돌라'와 대조되는 표현입니다. 6절에서 심히 기뻐하였다에 사용된 말은 '심하 그돌라'인데 이는 '큰 기쁨'이라는 의미입니다. 큰 기쁨을 통해 큰 악에서 요나를 건지시려는 하나님의 일을 성경은 이토록 대조적으로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기뻐하던 박 넝쿨이 시들자 그는 다시 분노를 표출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러자 성난 요나는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작은 위로가 사라지자 이같이 화를 냈습니다. 이제 요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체험하기 위한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몸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직접 체험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질문 (10-11)

 

이제 하나님은 당신의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박 넝쿨을 위해 수고하지도 않았고, 그것을 키우지 않았음에도 자기 눈앞에 속절없이 시들어가는 박넝쿨의 운명 때문에 속을 잔뜩 태우고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십니다. 요나가 그런 작은 박 넝쿨 하나를 아낀다면 하물며 그렇게 큰 성인 니느웨를 위해 하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만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모든 사람 역시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만물, 그런 사람들을 위해 슬퍼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잔인하기로 악명이 높았던 니느웨 백성과, 해상에서 일하는 이방의 선원들도,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남께서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는 것과 동일하게 그들 역시 그분의 돌봄을 받는 하나님의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선한 사람에게도, 악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해를 비취게 하시고 비를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의 주인이시며 그 만물을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닫힌 마음과 폐쇄성 때문에 우리는 악을 행하는 세상의 악인들보다도 더 악해질 수 있다는 근엄한 경고의 말씀을 우리는 요나서를 통해 들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이 시대 한국 기독교에 가장 필요한 메시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선민이요,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자의식에 빠져 있으면서도 오직 자신의 자아에만 몰입했던 요나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에 몰입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뜻과 어긋나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요나와 같이 분노하는 그 일이야말로 , 더 큰 악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현대판 요나

 

오늘날 교회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폐쇄성 때문에 자기 사고에 묶인 사람들만을 양산해내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부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진리와 정의를 앞세워 하나님을 독점하려하고, 오직 자신만이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착각하는 이기적이고 교만한 신앙인들이 현대판 요나입니다. 이런 현대판 요나들은 모범적인 신앙인들 가운데 더 많습니다. 그래서 '요나 신드롬'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기독교는 더욱 폐쇄적인 종교가 되고 사납고 무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자비를 입에 올리기만 해도 그들은 다원주의를 내세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이단으로 몰아붙입니다. 조금만 폭 넓은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 정통 믿음에서 벗어났다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끝없는 편 가르기입니다.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그런 자신들의 행동 때문에 이단들이 창궐하게 되고,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덕목이며 정체성의 근본이어야 할 형제애가 박살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판단하지 말라는 말이 실상은 자신들의 정체성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요나서를 통해서 우리가 확인했듯이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지독하게 편견을 가진 존재로 제한할 뿐만 아니라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야 하는 복음의 목표를 망각하게 하고, 사랑의 존재로 변화되어야 할 가장 근본적인 복음의 핵심을 휴지조각으로 만드는 더 큰 행악을 행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열린 존재로 만들어 우리 자신을 긍휼의 존재로 만들고 폭넓은 시각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세상에 실천하는 새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오늘 요나서를 통해 확인한 "더 큰 악"이라는 하나님의 지적을 겸허하게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시 한 편으로 우리의 묵상을 깊게 하고 싶습니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김상용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요.

갱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시인은 남쪽으로 창을 내겠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삶의 지향점을 가지겠다는 선언입니다. 시인은 세상 욕망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것이 아닌 다른 방향을 향해 살기로 결심합니다.  다른 이들과의 나눔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자연과 더불어 순리에 따라 살면서 왜 사냐는 질문을 받을 때 웃을 수 있는 삶을 살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는 삶을 이보다 더 리얼하게 표현하기도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시인처럼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많이 달라질까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그분의 뜻과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평화로운 곳이 될까요? 요나서는 그 길을 우리에게 열어줍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더 큰 악에 빠져드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큰 성읍 니느웨를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온 세상과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어지니♡
글쓴이 : 늘 종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