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영원한 진보로서의 그리스도인 (고후 3:1-6) 2014년 12월 21일
주홍글씨
주홍글씨는 미국 소설가 나다니엘 호손의 대표적으로 1850년에 발표되었습니다. 그 대략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17세기 미국 뉴잉글랜드에서 간음혐의를 받은 피고 헤스커에 대한 재판이 열립니다. 판사들은 헤스터와 간음한 남성이 누구인지를 묻지만 그녀는 끝까지 답변을 하지 않았습니다. 간음을 뜻하는 영어 단어 'adultery'의 첫 글자 A라는 낙인을 찍힌 채,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도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이때부터 헤스터와 딤즈데일은 대비됩니다. 헤스터는 자신도 삯바느질을 해서 딸 펄과 단 둘이 먹고 사는 어려운 처지였지만, 가난한 이웃들을 돕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녀의 도움을 받는 이웃들은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은 채 냉담한 반응을 보입니다. 이에 반해 딤즈데일은 겉으로는 거룩한 청교도 목사로 행세하지만, 속으로는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한편 헤스터의 죽은 줄 알았던 전 남편 칠링월스가 돌아와서는 헤스터를 죄 짓게 한 사람을 찾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딤즈데일에게서 몇몇 수상한 점을 발견한 칠링월스는 그를 점점 의심하게 됩니다. 마침내 헤스터와 딤즈데일은 도망하기로 결심하지만, 결국 딤즈데일은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숨을 거둡니다.
이 소설은 청교도 목사 딤즈데일의 죄책감과 그와 간음한 헤스터의 순수한 마음을 대비시켜 17세기 미국 청교도들의 위선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간음한 헤스터에게 A라는 붉은 낙인을 찍는다는 설정에서 붉은 낙인 '주홍글씨'는 인간을 얽매는 굴레를 뜻합니다.
바로 그 '주홍글씨'라는 단어가 제목에 들어가 있는 글 하나를 읽었습니다. 강남순 교수가 쓴 "'진보'라는 정신에 붙인 '주홍글씨'"라는 글입니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미국 시간으로 17일(수)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1959년 큐바 혁명이후 적대적 긴장 관계속에 있었던 큐바에 대하여 통상금지령을 포함한 모든 규제조치 풀고, 감옥에 갖힌 사람들을 자유롭게 풀어주면서 '적'에서 '친구'로 이행한다는 역사적인 선언을 하였다. 그 배경이야 어떻든 긴장과 대립, 정치이념적 갈등과 경제적 제재 등을 통해서 '보통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어려움들의 무게가 덜어지게 되는 역사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끊이지 않는 다양한 폭력과 전쟁의 소식들로 인해,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희망을 이제는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던 이들에게, 이 역사적 선언은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한 줄기 가능성을 다시 부여잡게 한 소식이 되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난 18일 (한국시간으로는 19일),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나은 세계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사회 곳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에게, 역사가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는 절망감을 구체화 시키는 '역사적 사건'을 결정했다: '진보'라는 고귀한 정신에 '법적-역사적 주홍글씨' 를 붙인 것.
저는 늘 복음이 정치적이라는 사실에 대해 말하지만 그것을 현실 정치에 직접적으로 빗대어 말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날 한국 개신교인들의 복음과 정치 이해가 너무도 경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 사람들은 나를 칭찬을 하지만 가난한 사람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구조에 대해 지적하면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로 여긴다."는 어느 주교의 말이 그대로 현실인 우리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와 애국심을 복음과 동일시하는 분위기가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설명한다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주홍글씨'라는 필자의 표현처럼 인간을 얽매는 굴레가 아직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곳이 바로 우리 사회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한 바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다면 모든 굴레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하는 복음의 의미를 영원히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강 교수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수'는 보호해야 하지만, '진보'는 해체시켜야 한국이 '안정된' 사회가 된다고 보는 단순한 이 이분법적 사유방식은, 사실상 폭력과 독재정치에서 가장 기본적인 모토가 되어 왔다. 도대체 '보수'와 '진보'란 무엇인가. '보수'의 우선적 의미는 기존의 질서와 체재를 보존한다 (conserve)는 입장을 강력하게 지니는 것이고, '진보'란 기존 현실의 현상유지 (status quo)가 아닌 '보다 나은' 사회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나아가려는'(progress) 정신이다. 인류는 이 '현실주의/보수'와 '이상주의/진보' 라는 이 두 축의 건강한 긴장관계속에서 문명을 발전시켜왔으며, 인권의 개념도 확장되고, 정의의 범주도 복합화되고, 평화와 평등의 이해도 제도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문화적으로 확장되어 왔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보'란 언제나 '유토피아적' 성향을 지니게 된다. 즉 기존의 세계 '너머'에 대한 갈망과 희망을 부여잡고 꿈꾸게 된다는 것이다.
복음은 듣는 이로 하여금 기존의 세계 '너머'에 대한 갈망과 희망을 부여잡고 꿈꾸게 합니다.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푸닥거리 한 마당이 되거나 기존의 질서와 체제를 보존하며 그 안에서 경쟁하여 이기는 성공주의 철학이 되어 기복주의라는 현세주의와 '사후 천국'을 복음의 전부로 믿는 진리의 조각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칼 만하임은 그의 책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Ideology and Utopia)' 에서 '유토피아'에 대한 논의를 할 때에 우리는 '절대적으로 실현불가능한 유토피아'(absolutely unrealizable utopia)와 '상대적으로 실현불가능한 유토피아' (relatively unrealizable utopia)를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한다. 즉 인류역사에 일어난 새로운 변화들은 언제나 새로운 세계,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꿈을 꾸던 이들에 의하여 가능하게 되었는데, 이들의 유토피아적 진보성은 '상대적으로 실현불가능한 유토피아'여서, '지금' 상황에서는 '실현불가능한 것' 이지만, 다른 역사적 정황으로 바뀌게 될 때에는 '실현가능한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제가 강남순 교수의 글을 읽고 깊이 공감한 부분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복음이 말하는 모든 것은 어떤 의미에서 유토피아적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현실 속에서 실천할 수 있고 그것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실천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란 불가능한 진리를 현실 속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가 그 불가능을 실천해나갈 때 우리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하나님 나라의 샬롬이 우리들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하고 있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복음을 실천하며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단순한 이상이나 불가능한 진리일 뿐입니다.
요즘 제가 번역하고 있는 책의 제목은 영어로 'FOR A CHURCH TO COME"입니다. 책을 번역하기 전에 재미있는 책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단순히 앞으로 다가올 교회의 모습이 어떤지를 말하는 것으로 내용을 짐작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번역을 해나가면서 책의 제목이 말하는 것이 전혀 다른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현실 속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천할 수 있으며 그래서 그 과정을 '실험'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는 실존주의 철학의 용어들과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사상이 담겨 있는 이 어려운 책이 제가 번역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책이라는 사실을 절감하면서도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번역해 나갈 때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성취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꿈꾸는 교회의 모습이 바로 이것이라는 공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제가 고민해왔던 바로 그 일에 대한 해답을 이 책이 저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새삼 성령의 인도하심을 느끼게 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세상의 방식을 거슬러 다른 방식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 말해줍니다. 그것은 영원히 진보적일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인의 숙명이라는 것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
사실 복음을 산 모든 이들은 불가능을 실천하며 살아간 사람들이지만 그중에 대표적인 인물을 뽑으라고 한다면 저는 사도 바울을 꼽을 것입니다. 그의 삶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고 그가 당한 고난들은 어느 하나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었는가를 생각할 때마다, 물론 성령의 이끌림을 받았다는 것이 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불가능을 실천하며 살아간 복음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 위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의 그의 삶은 고난의 점철이었습니다. 아라비아 사막에서의 삶을 시작으로 그는 처절한 외로움을 혹처럼 달고 살았습니다. 거기에 더해 결핍이라는 현실에 끝도 없이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의 삶 자체가 고난이라고 말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죽음이 항상 그의 옆에 상존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 24-27)
저는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위험들을 묵상할 때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지만 특별히 "동족의 위험"이라는 말이 늘 아프게 느껴집니다. 그가 말하는 동족은 유대인들일 것입니다. 그 동족들 중에는 유대 그리스도인들도 있고, 유대교인들도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양쪽 모두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유대교도들은 자신들을 배신한 배신자로 그를 죽이려 했을 것이고,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박해자였던 그를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어떤 위험과 고난보다도 가장 아팠을 것이라는 생각을 늘 하게 됩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몰이해야말로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잔인하고 혹독한 아픔이라는 걸 제 자신이 늘 느끼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가 군대를 앞세워 동쪽으로,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갈 때 사도 바울은 복음을 들고 서쪽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묘한 대조입니다. 우연이 아니라면 그것은 정말 멋진 상징입니다. 복음은 로마와 정 반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제국이며 열강인 로마의 방식과 반대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가 사도 바울을 통해 멋진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 사도 바울의 모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보다 더 무모해 보이는 일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초대 교회를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나무에 비유하였습니다. 실제로 초대 교회의 운명은 바위에 뿌리를 내린 나무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흙먼지에서 싹을 티운 작은 나무는 내리는 빗방울을 머금고 바위를 뚫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가히 생명의 신비, 혹은 생명의 장엄한 역사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것은 처절한 생존의 투쟁이었습니다. 실제로 초대 교회의 운명이 그러했습니다. 그 일을 사도 바울이 주도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은 길 위에서의 삶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끝없는 순례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고린도는 그가 머물었던 어떤 도시보다 각별한 곳이었습니다.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를 잇는 항구 도시 고린도에는 뱃사람들이 모여들기에 미신이 많았고, 집을 떠난 선원들을 위해 유곽이 발달해 있었습니다. 항구 도시 특유의 흥청거림 속에 머물며 그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그의 동역자임과 동시에 큰 힘이 되는 형제와 자매였습니다.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복음을 전하는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는 남다른 깊은 정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상황이 돌변했습니다. 교인들 간의 다툼이 벌어지고 파벌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비난하는 이들까지 등장했습니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복음을 전한 그의 동기마저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으로 낳은 형제와 자매들이 그와 같은 태도를 보일 때 사도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눈물의 편지'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본문은 그와 같은 한 차례의 회오리가 지난 후 비교적 안정이 된 상태에서 그들에게 보내진 편지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을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을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실존에 대한 아주 강력한 은유입니다. 지금 그들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고 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은혜가 온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편지는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요, 마음판에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편지입니다. 발신자는 그리스도이고 수신자는 세상입니다. 편지에는 발신자의 존재가, 발신인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숨결을 존재로서 전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편지인 우리를 통해 주님의 숨결을 누길 수 있을까요? 긍휼과 사랑으로 가난한 자들을 대하던 그분의 따뜻한 손길과 배려가 우리에게도 있을까요?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탐욕을 채워가는 이들을 향한 그분의 분노와 애통함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우리에게 새겨져 있는 편지는 돈과 명예와 탐욕으로 이끌리는 우리의 자아가 아니던가요?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의 총체적 난국이 닥친 것입니다.
일꾼
그리스도의 편지인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우리. 즉 바울을 포함한 복음전도자들에 의해 나타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의 손과 발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새 언약은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하나님 나라의 꿈입니다. 그 꿈은 우리가 처음에 생각해 본 것처럼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불가능하기에 가능한 그런 것입니다. 더구나 그 일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의 동역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지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고 인간은 영원히 그 일을 위해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 매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고통 받는 이들을 이웃으로 맞아들이는 것이 사랑이요, 복음임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사랑이 무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의 모든 기적은 사랑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사랑은 무능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생명의 역사입니다. 그 역사에 참여하는 사람의 삶은 그래서 세상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달리 고통 받는 이들의 아픔이 느껴집니다. 외로운 이들의 마음이 전해져 시려집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그에게 말을 걸고, 은과 금이 없어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사랑을 전할 수 있습니다. 비존재로 취급받는 이들에게 존재를 되돌려주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의 시작이며 하나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는 모든 장벽이 철폐되었습니다. 신분과, 빈부의 격차와 성의 차이와 같이 사회에서 절대적으로 여겨지던 보수적인 것들이 무너지고, 불가능이라 여겨지고 불온하게 여겨지던 진보를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온 인류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온 인류가 한 형제와 자매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귀고, 모든 사람들이 형제자매의 사랑을 나누는 그런 나라,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 품고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자신을 일꾼이라는 단어에 담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꾼은 낮은 자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일꾼으로 선언하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에 의해 마음에 새겨진 편지가 된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시중 받는 높은 사람이나 손님이 아닙니다. 이것저것을 지시하는 지도자가 아닙니다. 말없이 섬기는 사람, 궂은일을 먼저 시작하는 사람,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사랑 때문에 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신 주님을 따라 그분처럼 살기로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과 함께 일하는 모든 이들을 동역자로, 함께 수고한 일꾼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자와 영
바울은 그 새 언약은 문자(의문)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앙공동체를 살리는 것은 문자가 아니라 영입니다. 많이 아는 이들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이들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물론 지식이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식은 '사랑을 풍성하게 하기 위한' 이라는 목적 하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자기가 절대 진리를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형제애를 지닐 수 있겠는가?"라고 간디는 말했습니다. 요즘 제가 발견한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 사회가 점점 더 끔찍해지는 것은 약간의 학력과 지식에 절대성을 부여받은 전문가들이 양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는 절대로 진실된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이미 자신을 완성된 존재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진리의 길에서 이같은 태도는 치명적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일 뿐입니다. 주님의 영은 임으로 부는 바람처럼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인간이 성령을 이해할 수도 좌지우지할 수도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편지인 우리는 그 영에 의해 이끌림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처음에 소개한 강남순 교수는 자신의 글의 마무리를 이렇게 짓고 있습니다.
한 사회에서 이러한 '유토피아적 정신을 지닌 진보'적 사유를 한 사람들이 사라지게 되면, 그 사회는 죽은 사회가 된다고 폴 뤼케르(Paul Ricoeur)는 그의 책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에 대한 강연 '(Lectures on Ideology and Utopia) 경고한다. 이제 2014년 12월 19일,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인류사회가 추구해 온 보다 나은 정의, 평화, 평등한 세계에 대한 고귀한 열정을 담은 '진보'라는 담론과 실천에, '주홍글씨'를 붙임으로서, 한국의 자유 민주주의적 이상을 황폐화시키는 법적-역사적 오류를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는 한 줄, 한 줄을 멀찌감치 띄어가면서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언제,
누가,
어떻게,
이 역주행하는 시대정신의 시계를, 다시 되돌려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인가.
그녀의 말이 제 귀에는 한국 교회를 향해 하는 말처럼 들려집니다. 한국의 교회는 복음이 추구하는 정의, 평화, 평등한 세계에 대한 고귀한 열정을 담은 '진보'라는 담론과 실천에 '주홍글씨'를 붙임으로써 복음의 이상을 황폐화시키는 총체적 오류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마지막 질문이 바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져지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질문하는 그 질문에 답해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아니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신자유주의가 맹위를 떨치는,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조현아 사건과 같은 불의가 발생하는 이 시대의 등불이 되고 희망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어지니 교회 성도 여러분!
대림절 네 번째 촛불이 밝았습니다. 우리 마음에 오신 그분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로 영원히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가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신실하게 일하기를 바라십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맘몬의 시대에 죽어가는 이들과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는 이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존재의 존엄을 되찾아주고 꺼져가는 심령에 생명의 불을 되지피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영원히 진보일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의 편지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