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그 선지자`보다 위대하신 분 (요 6:1-15) 2014년 11월 16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닙니다.
르네 마그리트(1898-1967)라는 벨기에 화가가 그린 그림입니다.
이 그림이 유명한 것은 파이프를 그려놓고 그 밑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닙니다'라고 써놓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화가는 실재와 비실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화가의 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지 파이프 자체는 아닌 것입니다. 그림의 떡을 먹을 수 없는 것처럼 그림 속의 파이프로는 담배를 피울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림을 보고 파이프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파이프가 그려진 화폭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는 이와 같은 이야기들이 반복되어 울려 퍼졌습니다. "고맙게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믿는 신은 없다"라고 신학자 칼 라너는 말했습니다. 신은 없다고 말하는 부분에만 주목한다면 라너는 무신론자입니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신을 잘못 알고 있고, 잘못 믿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우리가 무신론자의 대표격으로 알고 있는 니체 역시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니체는 이 말을 통해 기독교의 신을 부정하였습니다. 그는 기독교가 믿는 신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신과 동일시하였고 결국 그는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라너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신을 부정하였지 기독교의 신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맙게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믿는 신은 없다"라는 자신의 말을 통해 그의 시대 잘못된 믿음을 지적하면서 참된 신은 누구인가를 물었던 것입니다. 잘못된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믿음을 성찰하도록 일종의 충격요법을 실시하였던 것입니다. 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모든 것을 비뚤어지게 만듭니다. 그것을 가장 정확하게 본 사람 중에 하나가 간디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영원한 스승으로 마음속에 새겼지만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진지하게 기독교의 신을 바라보았던 세 사람이 완전히 서로 다른 세 갈레 길을 걸었습니다. 라너는 실재를 파악하고 기독교 안에서 바른 신을 찾고자 하였습니다. 니체는 현실을 실재로 여기면서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간디는 실재를 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다른 길을 걷게 되었지만 세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지함입니다. 그들은 진지하게 기독교 안에서 진리를 찾았습니다.
그런 세 사람을 통해 우리가 보아야 할 또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진지한 성찰 없이 기독교의 신이 아닌 신을 맹신하거나 광신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맹신과 광신은 비 실재를 실재와 동일시하는 사람들에게 예정된 비극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무리들을 통해 다시 한 번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라너가 말하는 것처럼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잘못된 길을 걸었습니다.
갈릴리 바다
주제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가끔씩 헷갈리는 갈릴리 호수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디베랴 바다라는 명칭이 갈릴리 바다라는 말과 함께 등장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만 볼 수 있는 명칭입니다. 요한복음이 쓰이던 당시 팔레스타인 밖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곳은 갈릴리라는 명칭보다는 디베랴로 더 많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갈릴리 바다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립니다. 그 중 하나가 지금 우리가 본 디베랴입니다. 디베랴라고 불리게 된 것은 그곳에 디베랴라는 도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황제인 디베랴(티베리우스)의 이름 딴 도시를 헤롯 안티파스가 갈릴리 호수 서쪽 중앙에 건설했기 때문입니다. 분봉왕 헤롯은 그곳에 행정도시를 건설하고 황제인 티베리우스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곳의 지명을 황제의 이름을 따 티베리우스라고 지은 것입니다. 그것을 한자로 옮긴 것이 디베랴입니다.
갈릴리 호수의 또 다른 이름은 게네사렛입니다. 누가는 이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이 이름 역시 함께 사용되던 명칭이었습니다. 호수 북서쪽에 비옥한 평야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게네사렛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평야의 이름을 따서 게네사렛 호수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또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이 호수를 긴네렛이라고 불렀습니다.(신3:17; 수 13:27; 19:35) 긴네렛 호수라고 불리게 된 것은 호수의 전체 모양이 수금과 같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로 수금이 긴네렛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는 갈리리 호수가 통상 긴네렛 호수로 불렸습니다. 그러므로 갈릴리, 디베랴, 게네사렛, 긴네렛은 모두 한 호수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어느 곳에서는 갈릴리를 호수라고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바다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호수가 크기 때문에 그것을 바다라고 부른 것이 아닙니다. 갈릴리 호수는 남북이 21킬로미터 동서로 13킬로미터에 불과합니다. 호수 둘레도 55킬로미터가 채 되지 않기 때문에 차로 호수를 도는 데 한 시간도 걸리지 않습니다. 게다가 수심이 깊은 것도 아닙니다. 수심 역시 최고 깊은 곳이 44미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사해는 수심이 400미터에 이릅니다. 그런데도 갈릴리 호수를 바다라고 부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히브리어에는 바다와 호수의 구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 모두 '얌'이라는 단어로 불리기 때문에 갈릴리가 호수로 번역이 되기도 하고 바다로 번역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호수 건너편
본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를 건너 반대편으로 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하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건너편은 달라집니다. 동쪽 지역에서 건너갔다면 서쪽 지역으로 간 것이고, 서쪽 지역에서 건너갔다면 동쪽 지역으로 간 것입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건너편이라고 하면 서쪽 지역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갈릴리 호수 서쪽 지역에 모여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7절을 보면 제자들이 배를 타고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오는데 그곳은 호수 서쪽 지역에 있는 가버나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가셨던 호수 건너편은 호수 동쪽에 있는 벳세다입니다. 벳세다라는 말뜻 자체가 '어촌'이라는 뜻인데 마을이 갈릴리 호수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큰 무리(잠재적 제자)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 건너편에 가셨을 때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여기서 따르다는 동사는 헬라어로 '아콜루테오'인데 이 동사는 단순히 따르다는 의미가 아니라 제자직분을 가리킬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큰 무리들이 모두 제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큰 무리가 다 예수님을 좇는 제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점 또한 분명합니다. 병자들에게 일어난 기적들을 보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병자들이 낫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따르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듯싶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시몬의 장모를 낫게 하였을 때에도 구름같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들이 초보적인 믿음 혹은 부분적인 믿음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들은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앞으로 예수님께 충성을 다하는 진정한 제자가 될 수도 있지만 언제든 예수님께 등을 돌릴 수도 있응 사람들입니다. 6장을 읽어보면 이들이 제자들로서 언급은 되지만 예수님이 생명을 주는 참 떡이심을 말씀하시자 그들은 그것을 거북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해서 결국은 떠나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잠재적인 제자들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 선지자'보다 위대하신 예수님
3절을 보면 예수님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산에 오르시는 까닭은 2절과 연결하여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병자들을 낫게 하는 것을 보고 몰려든 무리들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5절에서도 예수님은 외딴곳으로 피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 산에 오르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적을 목격하고 난 후 초보적인 믿음을 갖게 된 무리들이 예수님을 기적의 도구로 삼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바람을 채우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산에 오르신 이유는 단순히 그들을 피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 의미심장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의 기자들은 예수님의 모든 행동을 구약과 연결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본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행하게 되실 오병이어의 기적과 함께 출애굽기에 묘사된 모세와 관련된 사건을 떠올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모세가 유월절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켜 광야로 인도하여 만나를 먹게 하고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과 계약을 체결했던 사건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러한 연상은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해 더욱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빌립에게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5) 이 질문은 민수기 11장에서 모세가 한 질문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민 11:13)와 유사합니다. 그러자 빌립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7) 이는 모세가 하나님께 한 말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민 11:22)을 상기시킵니다.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은 음식을 모아들이라고 명하시는데 이 명령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모아들이라고 한 명령을 연상케 합니다.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출16:16) 또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목격한 무리들의 반응도 모세와 연결하게 만듭니다. 무리들은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14)라고 하며 흥분합니다. 여기서 그 선지자는 신명기 18장 15절에서 예언한 그 선지자를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기억하며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올 것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리들이 생각하는 그 선지자가 아닙니다. 당시 무리들은 예수님을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보고 있었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예수님은 모세보다, 그 선지자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 먹여 주었는데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남자 성인만 계산해 오천 명을 배불리 먹여주시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떡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모세의 사명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것인데 비해 예수님의 사명은 하나님 나라라는 온 인류를 향한 새로운 약속과 복음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 기사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아니라 모세보다 아니 모세와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선지자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삼중의 역할을 하시는데 그중 하나가 오늘 말씀드리는 선지자입니다. 나머지 둘은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삼중 직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사명을 말하는 것이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무리들은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을 보지 못하고 그분의 이 땅에서의 역할인 삼중 직 가운데 하나인 선지자 역을 그분의 모든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왜 유대인들이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기다리고 있었는지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신명기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 (신 34:10-12)
이 기사의 내용과 같이 유대인에게 모세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바벨론 포로기를 거치고 귀향 후 다시 몰락의 길을 걸어 애굽의 노예 시대와 비슷한 로마의 통치시기를 살고 있던 그들에게 모세와 같은 선지자의 출현에 대한 소망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다시 모세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가 나타나 로마를 깨부수고 그들로부터 자신들을 구해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기적을 본 그들은 이 사람이야말로 자신들이 기다리고 있던 "그 선지자"라고 단정을 내리고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위대한 모세와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더 크신 분이십니다. 특히 본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예수님은 물 위를 걸으십니다. 예수님은 풍랑이 이는 갈릴리 호수 위를 걸으심으로 써 당신이 구약성경이 묘사한 하나님처럼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고 풍랑도 지배하는 신적인 존재임을 드러내십니다. (욥 9:8; 시71:17) 그리고 거센 풍랑에 두려워 떠는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킬 때 사용하시는 '에고 에이미' 즉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셔서 제자들을 위로해 주심으로써 당신의 존재를 계시하십니다. 다시 말해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아니라 모세보다 더 큰 존재, 생명의 떡을 주시는 분이심을 알려주십니다.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에서와 달리 기적(듀나미스)이란 말 대신에 표징(세메이온)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기적 사건보다는 그 기적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에 더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 핵심 메시지란 예수님의 신적 정체와 영적 진리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요한복음에 소개된 오병이어의 기적 기사는 공관복음의 같은 내용과 현저하게 다른 것입니다. 공관복음은 기적 자체만을 객관적으로 보도하지만 요한복음은 기적을 보도하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정체와 영적 가르침을 주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은 선지자이시면서 그보다 더 위대하신 분으로서 생명의 떡을 주시는 분이시며 영적 가르침이란 성찬을 통해 늘 기념하고 상기하게 되는 우리에게 현재로 계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깨달음
무리들은 그러나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서도 예수님의 이러한 신적 정체와 가르침을 배울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알고 믿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칼 라너의 표현처럼 그들은 그들이 보고 믿게 된 예수님을 자기 방식으로 해석하여 그 틀 안에 가둠으로써 진정한 예수님의 정체성을 보지 못하고 그분의 기적 속에 담겨 있는 의미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루는 피카소가 기차를 타고 가는데 옆에 앉은 사람이 그를 알아보고 "당신의 그림은 너무 난해해서 알아볼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피카소는 그에게 실제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주며 "이것이 실제 내 아내와 똑같은 모습"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피카소는 사진을 받아들고는 이러 저리 여러 각도에서 주의 깊게 들여다 본 후에 말했습니다. "당신 부인은 끔찍하게도 작군요. 게다가 납작하고요." 사진은 어디까지나 주머니에 넣어 다닐 수 있는 종이이지 실제 부인이 아닙니다. 피카소는 그림을 그리되 겉모양만이 아니라 마음을 읽고, 앞을 보면서 뒤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까지 나타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짧은 이야기가 드러내고 있는 상징성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나름의 고정된 사고로 사물을 고정시켜 놓고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피카소는 이 고정관념을 깨뜨린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이라는 단어가 새겨진 종이(교리)를 들고 다니면서 그것이 복음이라고 믿고 그것의 절대성을 주장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그리스도, 부활, 믿음, 구원, 교회 등에 대한 교리를 종이에 새겨놓고 그 종이를 절대 진리인 것처럼 떠받들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복음을 깨닫지 못해 일어나는 일입니다.
참된 신앙인,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단순히 복음을 교리로 아는 것만으로는 될 수 없습니다.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깨달음에 따른 실천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이 복음이 되고 진리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 나라가 실제로 드러납니다. 거기에서 인간의 존엄이 되살아나고 부활의 생명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드러내고 있는 모든 잘못된 현상들은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복음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를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무리들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분명 예수님이 비범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처해 있는 상황 과 자신들이 믿고 있는 지식안에 갇혀 예수님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잠재적인 제자들'이 될 수 있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었고 예수님의 행보가 자신들이 믿던 것과 달라지자 그분으로부터 등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한 때 그분을 따랐던 자신들의 실수를 합리화하고 만회하기 위해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또 다른 무리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비극을 통해 오늘날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교회의 비극을 볼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교리에 갇힌 믿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리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관념적인 신앙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익숙한 종교 습관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자기 지식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아로부터 벗어나고, 교회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 한 복판에서 복음을 실천하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여주고, 예수님을 보여주고,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면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드러내야 합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큰 무리가 예수님에게로 몰려들었지만 그들 가운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된 사람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극소수에 지나지 않은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제자의 길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이 바로 그 극소수의 제자의 길을 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힘을 합하여 의지하고 위로하고 도와주고 이끌어주면서 무엇보다 서로 사랑하면서 그 길을 걷게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