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신앙글)

[스크랩] 하나님의 아들 II (요 5:31-47) 2014년 11월 2일

J_카타리나 2014. 11. 8.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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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산지석

 

한 사람이 유대인에 대해 연구해 보고자 먼저 <구약성경>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에 대해 명확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탐구서이면서 지혜서인 <탈무드>를 연구해보지 않고서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탈무드에 대한 여러 가지를 묻기 위해 랍비를 방문했습니다. 랍비란 여러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유대교의 지도자로, 유대인 사회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스승이나 재판관이 되기도 하며, 또 어떤 때는 어버이가 되기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가 랍비에게 탈무드를 공부하고 싶다고 말하자 랍비는 그에게 아직 <탈무드>를 공부할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꼭 <탈무드>를 공부 해보고 싶다며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탈무드>를 공부할만한 자격이 있는지 시험을 해 봐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그에게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인 교양은 물론, 유대인들에 대한 상식과 관찰을 통해 쌓은 지식과 구약성경을 읽으며 얻을 수 있었던 정보가 이미 충분하다고 생갹되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의 간곡한 청에 못 이겨 랍비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름방학을 맞은 두 명의 소년이 굴뚝을 청소하게 되었소. 청소를 끝마친 두 소년 가운데 한 소년은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음투성이가 되어 내려왔고, 다른 소년은 깨끗한 얼굴로 내려왔소. 두 소년 중 어느 소년이 먼저 얼굴을 씻을 거라고 생각하오?"

"당연히 그을음으로 얼굴이 더러워진 소년이 먼저 씻겠지요."

"그래서 당신은 아직 <탈무드>를 공부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요."

"그럼 해답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만일 <탈무드>를 공부했다면 이렇게 대답을 했을 거요."

랍비는 진지한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얼굴이 더러운 소년은 깨끗한 얼굴의 소년을 보고 자신의 얼굴 또한 깨끗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반면에 깨끗한 얼굴의 소년은 더러운 얼굴의 소년을 보고 자기의 얼굴도 더러우리라 생각했을 것이오."

랍비의 설명이 끝나자 그가 뛰어오를 듯이 말했다.

"아, 이제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랍비는 앞서와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는 지체 없이 깨끗한 얼굴로 내려온 소년이 먼저 세수를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랍비는 또 다시 냉정하게 말했다.

"당신은 아직도 <탈무드>를 공부할 자격이 없소."

크게 실망한 그가 물었다.

"그럼 대체 <탈무드>에서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단 말입니까?"

그러자 랍비는 이렇게 대답했다.

"두 소년이 똑같이 굴뚝을 청소하고 내려왔다면 한 소년은 깨끗한 얼굴로, 다른 소년은 더러운 얼굴로 내려올 리가 없는 일 아니겠소?"

 

결과적으로 그는 랍비의 시험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목사나 신부에게 다가와 성경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면 어떻게 말했을까요? 목사에게 그런 질문을 했다면 목사는 맨발로 달려 나와 잘 생각했다며 그를 환영했을 것입니다. 신부의 경우는 아마도 성경을 잘 아는 수녀와 만나게 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랍비는 탈무드에 관심을 표하며 다가온 그 사람에게 까다로운 질문을 하고 퇴자를 놓은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가 탈무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탈무드는 기원 전 5백 년에서부터 기원 후 5백 년까지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것을 2천여 명에 달하는 학자들이 십 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힘을 합쳐 편찬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탈무드는 완성된 책이 아니라 그 책이 편찬된 이후부터 그 책을 읽고 공부한 사람들의 정신과 깨달음이 오늘날까지도 더해지고 있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탈무드는 마지막 한 페이지가 비어 있습니다. 그 빈 공간에 항상 새로운 말이 덧붙여졌고 새로 출판되는 탈무드에는 그것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렇게 탈무드는 단순한 책이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의 영혼을 담은 유대인의 전통이며 역사이며 유대인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런 책을 유대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배우려 할 때 과연 그 책에 담겨 있는 정신과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있을까요?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랍비는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관한 유대인들의 태도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아니 배워야 합니다. 먼저 그들은 무엇보다 탈무드의 가치를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과연 성경의 가치를 알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정말 그 가치를 알고 있다면 우리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읽는 정도가 아니라 주야로 묵상하며 그것이 복임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섣불리 자신이 성경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경 자체를 숭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만큼 값지고 귀한 것임을 제대로 안다면 우리도 랍비와 마찬가지로 성경을 배우러 다가오는 사람에게 정신을 차리게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중인과 증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이제 증인과 증거들을 통해 변호하고 입증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적 정체는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고 증인을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8장에서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14)라고 하신 말씀에서 보듯이 만일 증거가 있다 해도 인간이 알 수 없고 다만 믿을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애초부터 믿지 않고 있는 그 사실에 대한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들은 그들에게 증거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13)

 

유대의 법정에는 언제나 증인이 필요했습니다. 유대의 법정은 세계사적으로도 없는 독특한 정의가 살아 있습니다. 세계 어느 곳, 어느 문화라도 법정에서 가장 신뢰하는 것은 당사자의 증언과 고백입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법정은 피고를 심문하지 않습니다. 피고에 대한 심문이 정의와 진실을 구부러지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극을 통해 보듯이 일단 심문이 시작되면 심문을 하는 사람의 의도대로 진행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주리를 틀기 시작하면 결과는 언제나 주리를 틀게 한 사람의 의도대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잘 아는 유대인들은 본인 심문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증인들의 증거를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말이 법적 증거로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진술을 뒷받침해주는 최소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따르는 것으로(민 35:30, 신 17:6; 19:15) 그들에게는 중요한 전통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관습을 잘 아시는 예수님은 그들의 관습에 따라 증인과 증거를 제시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증언입니다.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32)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37)

 

물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증언을 직접 들을 수 있는 방법으로 주어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당신의 갈림이 없는 일치 그리고 당신이 아버지께 파견되어 사명을 수행하고 있기에 하나님께서 바로 증인이시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세례 요한의 증언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1:29)라고 하였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증거하였노라."(1:33-34)

 

당시 세례 요한은 유대 사회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입니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36)

 

예수님의 하시는 일은 예수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주신 사명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한 번도 '내 일들'이란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네 번째는 성경의 증언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에게 하시는 증언이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모세오경과 예언서들과 같은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참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39)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46)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런 증언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들으면 들을수록 예수님이 신성모독의 범죄를 저지르는 극악한 인물임을 확신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성경의 말들도 믿지 않았기에 예수님의 말씀 역시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

 

우리는 지난부터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어떻게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가를 증명하시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저는 방향을 조금 달리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이 사실을 우리와 관련지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증언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피조물의 고대한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롬8:19)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예수를 믿어 죽은 후에 천당에 가게 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살펴본 예수님의 변호에서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가를 변호하고 입증하셨나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어떻게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가를 변호하신 그 부분이 하나님의 아들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삶의 지침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먼저 그분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입증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인 역시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누리셨던 그 친밀한 교제를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예배와 기도와 같은 종교적인 일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것과 같이 일상의 모든 삶에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들어간다면 우리는 그분의 뜻을 헤아릴 수밖에 없고, 그분을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증언해주시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하님님께서는 예수님께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를 위해 친히 증거 해주 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맹세를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아버지이신 그분의 뜻을 따라 그분과 일치를 이루며 살아가게 될 때 우리를 증거하시는 이는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께 파견되어 아버지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다른 이들의 증언을 듣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증언을 들으셨습니다. 이제 우리 곁에 세례 요한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곁에는 수많은 소자들이 있습니다. 약하고 고통 받는 도움이 필요한 손길들이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섬기며 살아갈 때 그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 증언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단순히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조금 전 살펴본 것처럼 신음하는 피조물들 역시 우리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자연을 사랑하고 그 자연이 내어주는 것들에게 감사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갈 때 자연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증언해 줄 것입니다.

 

네 번째로 우리의 하는 일이 우리의 정체성을 말해줄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부분이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세상 사람들이 보고, 특히 그리스도인들의 사는 모습을 보고 '아 저 사람들이 사로 사랑하고 있다!'고 다시 말하게 될 때 우리는 바로 세상 사람들의 입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언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역이 아니라 위대한 건축물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그 모습을 세상 사람들이 보고 그것을 인정하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런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세상을 섬길 때 우리는 세상의 희망이 되는 '산 위의 동네'로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일조를 하게 될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그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바른 것임을 성경이 증언해줄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복음이 품고 있는 폭넓은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복음에 담겨 있는 위대한 진리의 삶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만일 기독교가 복음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삶으로 넘치게 된다면 세상은 변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기독교가 세상의 권세를 가진 자들의 박해를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끝까지 자신의 가진 힘과 권한으로 자신의 뿌리를 흔드는 기독교를 제거하려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이제 처음에 말씀드렸던 탈무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탈무드를 배우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진단을 내렸던 그 랍비는 그러면 탈무드를 배우겠다고 찾아왔던 그 사람을 그냥 돌려보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그를 유대인들과 접촉하게 하고 유대인들의 삶 속에서 실천되고 있는 율법의 의미들과 거기에온 힘을 다 쏟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하나씩 보여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유대인들의 모든 것에 대해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가지게 되었을 때 탈무드 공부를 시작하게 해주었을 것입니다.  

 

기독교 역시 그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는 책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계시를 볼 수 있게 해주시는 창이십니다. 그런 분을 그냥 "믿느냐?"는 한 마디로 알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무조건 믿으면 된다'고 말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실제로 초대교회에는 '비밀의 훈련'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다가와 일원이 되고자 하는 이들을 아무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예배와 성찬에 참여시키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그들과 같이 살게 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익히게 하였고 그들의 삶에 담겨 있는 의미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을 때 예수와 십자가의 도를 그들에게 가르치고 전했습니다.

 

저는 늘 바로 그 초대교회의 '비밀의 훈련'을 이 시대에도 되살려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다가와 예수에 대해 알기를 원한다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익숙해지고 서서히 그들의 삶 안에 담겨 있는 진리들을 하나씩 소개하고 마침내 그 모든 것의 핵심인 예수에 대해 말하는 그런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세상의 법이 아니라 사랑이 질서를 이루는 사회, 돈이 아니라 사랑이 삶의 동기가 되는 삶이 이 땅에서 가능함을 보여주어 그들 역시 그 사랑에 투신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복음은 듣고 배우는 것이라기보다는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여러 곳에서 그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의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히 13:7)

 

그러나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그런 복음의 삶을 보여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없습니다. 복음을 보여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없습니다. 살아 역사하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산 위의 동네'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오늘의 현실을 보게 해주셨다면 그 일이 바로 우리의 사명임을 알아차리고 그 일에 매진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9)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향해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당신처럼 복음이 되기를 바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분처럼 복음이 되는 날, 우리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님처럼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세상에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따라 해야 할 일입니다. 그 일을 이루어 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어지니♡
글쓴이 : 늘 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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