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신앙글)

[스크랩] 영적 성숙과 용기 (요21:15-18) 2014년 10월 5일

J_카타리나 2014. 10. 5.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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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보자

 

김 병구 선교사님과 영화를 한 편 보았습니다. 아무런 부담 없이 그냥 시간 때우기 용 영화를 찾았습니다. 모든 것을 잊고 그냥 한 번 속없이 웃고 싶었습니다. 한 영화 평론가의 글에서 '해적'이이라는 영화를 보다가 옆에 앉은 사람이 크게 웃는 모습이 우스워 더 웃게 되었다는 내용을 보았기에 '해적'이라는 영화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종영이 된 상태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비긴 어게인'이라는 영화가 감동적인 면이 있다기에 그것을 보려고 했더니 이번에는 시간이 맞지 않았습니다. 시간에 맞추어 또 다른 영화를 한 편 골랐는데 얼마냐고 물었더니 4만원이라고 하였습니다. 놀라 왜 그렇게 비싸냐고 물었더니 구별된 넓은 자리에 앉아 보는 영화였습니다. 촌놈이 영화 한 편 보려니 그것도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두 군데 상영관을 왔다 갔다 하며 정한 영화가 '제보자'였습니다. 황 우석 박사를 소재로 한 영화였습니다. 엠비씨 피디수첩 이야기가 그 줄거리인 영화입니다.

 

새롭게 알게 된 내용도 없었고 조금은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였기에 처음에는 조금 지루했습니다. 그런데 별 반전이 없이 그렇게 영화는 끝났습니다. 별 재미는 없는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기억에 남는 것이 있었습니다. 용기입니다. 주인공 피디가 갖은 압박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겨내고 자신의 할 도리를 다하는 모습에서 용기를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중간에 포기했을 것입니다.  너무 튀지 말아야 하고, 너무 모나지 않아야 하는 세상의 방식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인공 피디는 달랐습니다. 그는 의지를 꺾지 않았습니다. 불합리한 현실, 꼼짝달싹 할 수 없게 만드는 불공정한 권위 앞에 그는 무릎을 꿇지 않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를 이해하고 후원자가 되어 주었던 동료들도 그에게서 등을 돌리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쌍욕을 해대고 안 피우던 담배 몇 개비를 피우긴 했지만 뜻을 꺾진 않았습니다. 실직은 가장에게 가장 큰 위협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질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온갖 회유와 협박을 이겨내고 진실을 밝혀냈습니다.

 

진리 앞에 어정쩡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항상 대가를 요구합니다. 그 앞에 가장 큰 적은 언제나 현실입니다. 현실은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진리의 길을 가로막습니다. 연약한 인간은 그러한 현실의 요구에 언제나 속수무책입니다. 현실의 벽은 언제나 너무 높습니다. 권력은 늘 생명까지도 위협하는 막강한 세상의 철옹성입니다. 그것을 넘기란 불가능해 보이기 마련입니다. 가까운 사람들의 안전은 언제나 발목을 잡는 걸림돌입니다. 대중들은 물론 가까운 이들의 몰이해 역시 쉽지 않은 걸림돌입니다. 그것을 이기고 진리가 요구하는 길을 가기 위해서는 그래서 불굴의 의지와 타협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주인공 피디에게서 그 용기를 보았고 그 용기가 부러웠고, 그런 용기를 가진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웠습니다.

 

진리의 길, 예수님의 길은 피디가 보여주었던 용기보다 수십 배, 수백 배 아니 그 이상의 더 큰 용기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런 용기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드물기 마련입니다. 과학 기술의 진보와 문명의 발달은 수없이 많은 새로운 필요를 양산해냅니다. 오늘날 광고는 그러한 필요에 대한 강박관념을 만들어냅니다. 필요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돈의 위력은 그런 필요의 증가와 강박관념의 증가에 따라 더욱 막강해집니다. 그렇게 변해가는 현대의 삶 속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기를 부인하라는 성경의 요구는 점점 더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불굴의 용기입니다.  

 

영화가 끝나고 선교사님과 나눈 대화는 그것이었습니다.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 복음에 투신할 수 있는 용기, 사랑에 투신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그리스도인이 너무도 그립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현실에 타협하지 않는 사람, 어떤 현실의 위협 앞에서도 뜻을 꺾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 건설에 참여하고 싶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한국교회 안에도 '제보자'는 넘쳐납니다. 그들은 비리를 고발하고 개혁을 촉구합니다. 하지만 주인공 피디와 같이 그것을 파 헤쳐 나갈 용기 있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다른 용기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필요한 용기는 인간의 결단과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성숙의 문제입니다. 용기 있는 사람도 드물지만 용기가 전혀 없는 사람도 드물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곧 인간의 용기 그 자체만으로는 진리의 길을 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에 투신하고, 사랑에 투신하고 하나님의 정의에 투신할 수 있는 용기는 생래적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용기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용기입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덤벙거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베드로는 매우 용감한 사람입니다. 그가 언제나 나서는 사람처럼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가 용기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당신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임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앞으로 나서 주님을 만류하였습니다. "그리 마옵소서!"(마16:22) 그것은 베드로에게 충정이 넘쳤을 뿐 아니라 옳지 않은 것을 보고 그대로 있지 못하는 그의 용기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마26:31)고 말씀하시자 그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33)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마지막 주님께서 잡히시는 현장에서도 베드로는 용감하게 칼을 빼어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베드로를 향해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4)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인간의 용기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에 필요한 용기는 타고난 생래적인 인간의 용기가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자기 자신의 한계를 처절하게 체험한 사람에게 비로소 주어지는 다른 종류의 용기입니다. 불타는 열정으로부터 나오는 용기가 아니라 처절한 자기 한계를 경험한 무력함으로부터 나오는 전혀 다른 새로운 용기입니다.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고 나자 허무감에 사로잡힙니다.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그러나 그런 주님께서 아무런 저항도 없이 스스로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의 길에 들어서시자 그는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실이 두려워 멀리 도망을 치고 말았지만 베드로는 그들과 달리 체포당하신 예수님의 뒤를 쫓았습니다.

 

비록 멀찍이 떨어지긴 했지만 그는 예수님께서 끌려가신 대제사장 집의 뜰까지 따라 들어갔습니다. 한 여자 하인이 바깥뜰에 있는 그를 알아보고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69)라고 하자 그는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70)라는 말로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저주와 맹세까지 해가며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74)라며 철저히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 닭이 울었고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 밖으로 달려 나가 심히 통곡을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처절하게 부서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 돌이켜 그를 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2:61) 그 눈길은 결코 분노나 경멸의 눈길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신 것 같지만 사실 예수님은 인간의 한계를 경험하고 있는 베드로를 측은하게 쳐다보셨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그 눈길을 평생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눈길이야말로 자신의 한계를 목격하고 있는 주님의 눈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새로운 용기가 주어진 것은 전혀 다른 방법에 의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살아나신 후에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비록 도망을 치고 말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갈릴리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 시간은 제자들에게 마음 편하지 못한 부끄러운 시간이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로 가노라."(요21:3)라고 말하자 나머지 제자들도 배에 올랐습니다. 그들은 그날 밤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제자들이 처절하게 무력함에 사로잡혀 있는 그 시간 예수님은 바닷가에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빈손으로 돌아오는 그들에게 고기를 얼마나 잡았느냐고 물어보신 후에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물 가득히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렇게 많은 고기가 잡히면 통상 그물이 찢어졌지만 그날 그물은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아침을 먹이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자기 한계를 처절하게 경험한 베드로는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우회적으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똑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하시자 그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은 당신의 양들을 부탁하셨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비로소 참된 용기를 가진 주님의 제자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일에 필요한 용기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주어지는 전혀 새로운 용기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고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용기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으로부터 비롯되는 전혀 다른 성격의 용기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던 베드로의 오만함이 사라졌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과 영혼이 성숙해진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이 성숙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용기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사람으로 비로소 준비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이 걸어야 했던 신앙의 여정을 걸은 것입니다.

 

출애굽(엑소두스)

 

성경은 신앙이 여정임을 여러 곳에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 미지의 땅으로 가는 믿음의 여정을 명령하셨습니다. 모세의 인도로 여정에 오른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홍해를 건너고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다 마침내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결국 정신을 차리고 귀향의 여정에 올라 새롭게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누구랄 것도 없이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가 이렇게 신앙의 여정을 거친다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이 광야 길을 걷게 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노예살이를 하던 애굽 땅에서 자유의 땅인 가나안으로 가는 중간에 광야 길을 거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광야는 과정인 것입니다. 자유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중간 과정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단순히 공간적, 시간적 차원의 중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존재 자체가 변화를 겪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사백여 년 간 애굽에서 노예로 지내다가 탈출한 이스라엘이 즉시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경과했다고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외적인 상황이 변한다고 사람이 변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은 존재 자체가 거듭나는 자기 정화와 자기 정립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광야가 갖는 근본적인 의미입니다. 광야는 존재 자체가 변화를 겪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광야를 거쳐야 했듯이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자유인이 되기 위해 반드시 광야를 거쳐야만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광야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그들에게 익숙했던 애굽이라는 세계를 버려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익숙한 관습과 가치관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수백 년간 애굽 문화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진 사람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쉽사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의 뼛속까지 스며들어 있는 애굽의 잔재들을 털어버려야 했습니다.

 

애굽은 그러나 쉽사리 버릴 수 있는 호락호락한 그 무엇이 아닙니다. 애굽은 오늘날 최고의 경제적, 군사적 힘을 자랑하는 대제국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미국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대학과 도서관 그리고 피라미드가 있는 나라였습니다. 그런 나라에서 수백 년간 노예살이를 한 이스라엘이 하루아침에 애굽의 문화와 가치관을 떨쳐버릴 수도 없었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배울 수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배우기 위해서는 애굽에서의 옛 가치관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과거의 삶의 양식을 버리고, 과거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버리고 새로운 나라인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배우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변화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출애굽이라는 말은 단순히 애굽을 탈출한다는 말이 아니라 애굽의 모든 것을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그리고 자유인이 되기 위해 우리는 과거의 인습과 과거의 자아를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새로운 무엇을 더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안주해 왔던 세속 중심의 삶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즘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는 S교회가 그토록 오래도록 제자 훈련이라는 교육을 실시해 왔지만 왜 그들이 자신들의 교회 이름처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는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교육을 받았지만 세상으로부터 '엑소두스'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체험하는 곳

 

구약성경을 보면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저버린 이스라엘에게 자주 목소리를 높여 광야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도, 예레미야를 통해서도 광야를 언급합니다. 광야에서 당신을 따르던 날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광야로 돌아가라고 호소하는 이유는 광야를 통해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생의 조건이 결여된 광야에 섰을 때 자기가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열심히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과거를 회상하기도 하고 미래를 바라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눈앞에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에게 소중했던 모든 것들이 그곳에서는 무용지물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자신이 점점 더 빨리 죽음을 향해 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광야는 그렇게 처절하게 자신의 한계를 체험하는 곳입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양들을 키우며 상념에 젖었을 것입니다. 그는 애굽의 왕자였습니다. 화려한 자신의 과거가 자신에게 번민만을 더하는 기억임을 깨닫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자신이 양들이나 돌보고 있는 현실이 답답합니다. 그런 양을 치는 일마저 자신의 의지대로 하지 못하고 처가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럽습니다. 사십 년간이나 반복되는 그런 일상 속에서 그는 모든 것을 바람에 날려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없이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데릴사위가 되었습니다. 그의 안에 들끓고 있던 민족을 향한 열정도 식어버렸습니다. 남달랐던 그의 학식도, 그의 무예 솜씨도, 남을 배려하던 그의 마음도 사막의 열기 속에서 사그라지고 모래 바람에 날려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무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상태가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었습니다.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가시덤불에 나타나신 하나님에게 필요한 사람은 바로 그렇게 자신의 한계를 처절하게 경험한 무력한 사람이었습니다. 광야는 그렇게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고 처절하게 부서지는 곳입니다. 그런 후에도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기 위해서는 그가 신고 있던 신발마저 벗어야 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능력이 끝난 곳, 인간의 모든 이력을 벗어버린 그곳에서 새로운 사명이 시작되고, 새로운 용기를 가진 한 인간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선순위를 보게 되는 곳

 

그렇게 무력한 사람이 된 후에야 인간은 비로소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생의 조건이 결여된 광야에 섰을 때 자기가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이끄신 것은 그들에게 생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의 근본임을 몸으로 철저히 체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생의 기본조건이 철저히 말살된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뿐이었습니다. 광야라는 환경적 악조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광야에서 목이 탈 때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외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창자가 오그라질 때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애원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다른 민족의 침입을 받아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에도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향해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것뿐이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후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인생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광야는 우리에게 삶의 우선순위를 가르쳐 주는 장소입니다. 고통스런 삶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우선순위, 다시 말해 첫째 자리를 내어드려야 합니다.

 

19세기 말에 태어난 종교적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내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병고와 가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현대인의 관점으로는 미친 사람이라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그가 병고와 가난이라는 인생의 광야를 통해 하나님을 생의 첫 자리에 둘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정적으로 여기는 인생의 광야는 사실은 귀한 보물과 같은 것입니다. 광야는 우리를 깨달음으로 초대합니다. 먹고 살기에 바빠, 인생을 즐기기에 바빠 삶의 의미나 진리의 세계를 추구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우리에게 광야는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라고 초대합니다.

 

구약 학자인 월터 브루그만은 신앙이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과정을 하나님과 함께 거듭 통과해 나가는 것이라 보았습니다. 브루그만의 모델에서 첫 번째 시기인 영적 출발은 확실히 방향이 정해지는 시기입니다. 새로 믿어 하나님의 복음을 경험하고 영적 여정에 오르는 단계라 할 수 있는데, 이 단계를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된 일에 견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인 영적 시련기는 괴롭게 방향이 어긋나는 시기입니다. 많은 씨름과 회의와 위기와 어쩌면 영혼의 어두운 밤까지도 경험하는 단계라 할 수 있는데, 이 단계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방황하던 시기와 비슷합니다. 브루그만의 모델에서 세 번째 요소는 다시 확실히 방향이 회복되는 일입니다. 즉 영적 소생을 맛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져 절망 대신 기쁨을 누리는 시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일이 마지막 단계의 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영적 성숙과 용기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용기는 영적 성숙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사랑에 투신할 수 있는 용기, 하나님의 정의에 투신할 수 있는 용기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영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사회의 지탄을 받게 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인간의 결단과 용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영적으로 성숙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용기에서 비롯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자기 계발의 달인인 공병우라는 분이 <공병우가 만난 예수님>이라는 기독교에 관한 책을 썼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 내용이 성경학자들을 능가하는 부분이 있다는 논평을 보았습니다. 공병우님과 같은 분이 기독교에 관한 진리를 집대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결코 하나님 나라의 일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분이 세상을 '엑소두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광야라는 성숙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한계를 체험하고 처절하게 부서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능력 있는 인간으로써 그 책을 썼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쓴 책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식을 전달해줄 수 있지만 결코 하나님의 지혜를 전달해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세상의 방식과 세상의 인기를 등에 업고 기독교 안에서도 활보하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불행의 씨앗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오직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용기에 의해서만 진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에게서 보듯이 자기의 한계를 처절하게 경험한 사람만이 오직 모든 것이 주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사랑만이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진정한 용기의 근원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베드로처럼 자신이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주님께서 아신다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무엇인가를 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십시오. 우리가 정녕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순간이 오면 주님은 우리를 불러 신발을 벗으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마른 지팡이 하나를 들고 막강한 제국의 황제를 향해 나아가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에 강물처럼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날을 향해 용기 있게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어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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