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사랑의 혁명
주류 교회 안에 있는 두 부류의 사람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교회들 안에 개혁 단체들이 생겼고 그들이 일간지(조선일보와 한겨레)를 통해 교회 개혁을 촉구하자 같은 날 ㅎ교회언론회 대표가 이를 비판하고 나셨습니다. 이유는 교회 내부의 일을 외부에 알린 행동은 교회를 망신 주려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개혁 단체들은 공동으로 개혁을 촉구하는 성명을 실었습니다.
"국민 여러분! 부패한 '종교 사업가' ㅇ목사와 ㄱ 목사를 응징해 주세요."라는 제목으로 두 목사의 △불투명한 교회 재정 운용 △독단적인 교회 운영 △대기업 회장에 버금가는 호화로운 생활 △비자금 조성과 논문 표절 등을 문제 삼았습니다.
이들의 성명이 알려지자, 같은 날 ㅎ교회언론회는 "옳지 못한 일 중에서 가장 악한 방법을 책망한다"는 제목으로 논평을 냈습니다.
논평은 성경은 교회 내부의 일을 세상 법정에 제소하는 것을 꾸짖고 있다며,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자들에게 교회의 분쟁을 해결해 달라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는 일에 모순되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런 일이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를 망신 주려는 일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집안일을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아주 큰 소리로 비난하는 것이며 그런 일은 '패륜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주류에 속하는 한국 교회 안에는 이렇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먼저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입니다. 개혁 단체들의 행동에서 보듯이 이들은 모든 잘못된 것들을 낱낱이 밝혀 그것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그들이 처음부터 그런 태도를 취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목사와 교회를 존중하고 함부로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오래 참았습니다. 말없이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고자 많은 노력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그들 앞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의 벽은 너무도 높았습니다. 누가 보아도 명백히 잘못된 일들도 순순히 바로잡아지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모여 단체가 되었고 그래도 요지부동인 명백한 잘못들이 그들을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순수합니다. 그들은 단호하게 그것이 주님에 대한 충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저항하는 과정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조금씩 과격해지고 마음이 굳어지게 됩니다. 조금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너무 똑똑하고 옳은 사람들이 됩니다. 그리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매우 사나운 사람들로 변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사랑의 속성과는 반대의 길을 걷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냉랭한 마음을 가진 방관자들이 되어 열정 아닌 열정을 지닌 투사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개혁을 주장하는 분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은 아무리 명백한 잘못을 저지르고 그 증거가 아무리 뚜렷하다 해도 본인 스스로가 그 잘못을 깨닫고 인정하기 전에는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온유한 방법으로 잘못한 사람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돌아설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나그네의 모자를 벗긴 것은 강한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이었습니다. 끝까지 못 깨닫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돌아서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또 한 부류는 ㅎ교회언론회의 입장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한국 교회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 부류에 속합니다. 그들은 자기 교회는 물론 한국 교회 안에 사회에서 지탄 받을 일이 일어나고 있어도 애써 외면하거나 못들은 척 합니다. 교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목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런 일을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분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교회나 목사에게 손가락질을 했다가는 저주를 받는다는 인식이 한국 교회 안에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는 이유는 그들이 기독교에 대해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굿판의 무당들이나 점치는 집에서 점쟁이들이 취하는 태도와 그들을 대하는 일반 사람들의 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묻지마 신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조건적인 맹종, 이성의 마비, 부화뇌동, 방향이 없는 열정 등으로 기복신앙을 넘어 기독교의 미신화와 종교놀음화에 토대를 제공합니다.
결국 이런 분들의 교회를 아무리 지키고 보호한들 복음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어쩌면 이런 분들의 교회가 사라져야 제대로 된 하나님 백성 공동체인 참된 교회가 세워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라지를 가리는 일은 추수 때 농부의 몫입니다. 다만 교회가 '산 위의 동네'가 되어 세상의 등불이 되기 위해서는 인식 가능한 모든 범죄와 악한 일들을 가려내야 합니다. 가리고 감추는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세상 사람들의 희망이 될 수 있는 투명한 교회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대한 실험의 기록을 남기는 사람들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복음의 본질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고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전혀 새로운 계명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의 정신 역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십계명을 '사랑의 계명'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을 말씀하셨고 율법사 역시 자신과 믿는 것이 동일한 예수님의 대답을 책잡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이 새 계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유대인들의 사랑의 계명이 화석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하면서도 이방인을 가르고, 죄인을 가르고, 상석에 앉는 이를 정하기 위해 사람을 가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그런 모든 행동 속에 들어 있던 가식과 위선을 허무셨습니다. 이방인의 벽도, 죄인의 벽도, 사회적 신분의 벽도, 심지어 남녀의 벽까지 허무셨습니다. 그리고 몸소 유대인들이 상종조차 하지 않던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이 새 계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분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은 사랑에 투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35)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의 구분은 간단하고도 명료합니다. 서로 사랑하느냐가 그 관건입니다. 오늘날 실종된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시간에 이름도 모르는 옆 사람을 쳐다보며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며 끌어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실제 행동으로 증명 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진리인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그런 의미에서 진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생하게 보여준 사람이 있습니다. 간디입니다. 간디는 자신의 자서전 제목을 <진리에 대한 실험의 기록>이라고 붙였습니다. 즉, 간디는 자기 인생의 목표를 '진실하게 살기'로 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간디는 자기가 한 평생을 통해서 '진실하게 살기'라는 자신의 목표를 잘 이루었는지 자서전을 통해 점검을 해본 것입니다.
간디가 위대한 것은 그가 큰 인물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진리에 투신했고 진리대로 살고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위대한 영혼이라는 의미의 '마하트마'라는 호칭을 붙여주었습니다. 물레를 돌리는 일은 결코 위대한 일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소박하게 사는 것도 결코 위대한 일이 아닙니다. 단식을 하는 것은 약자의 항거 수단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사소한 실천들은 그 파장이 엄청났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진리를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그의 진리에 대한 실험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세상의 지탄을 받는 한국교회에 필요한 사람들은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그런 그들을 '패륜아'로 지적하는 사람들도 아닌 진리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개인주의에 익숙해진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담긴 의미를 피상적으로 이해합니다. 아니 그 의미를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이 정확한 실상일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던 프란치스코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포악한 나환자가 간호하는 수사들을 모욕하기도 하고 때리기도 했기 때문에 수사들은 그를 악마가 붙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매번 지독한 저주의 말을 토했는데 수사들도 처음에는 그에게 그런 대우를 받는 일을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는 의심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같이 포악한 모독자의 시중을 드는 일이 과연 좋은 일인지 의혹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상의를 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수사들과 함께 직접 그 나환자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험상궂게 일그러진 그를 보고 말을 건넸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환자는 대뜸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썩은 고기와 고통의 덩어리일 뿐이다. 평화 따위가 다 무엇이냐?”
프란치스코는 그에게 고통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참으면 육체의 고통을 영혼의 구원으로 바꿀 수 있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환자는 다시 소리를 질렀습니다.
“도대체 무슨 재주로 밤낮 쉬지 않고 주어지는 이 아픔을 참으라는 거냐? 그것만이 아니다. 네가 여기 보내주는 수도사들은 한 놈도 나를 친절하게 간호해 주지 않았다.” 고통에 시달려 자포자기한 환자는 불만과 욕설을 내뿜었습니다.
그런 그를 참으며 프란치스코는 말했습니다. “오, 그래요? 좋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당신의 시중을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럼 한 번 해 봐. 도대체 너는 그놈들보다 뭘 더 잘할 수 있느냐?”
“당신이 부탁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 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내 몸을 좀 씻어주게. 에, 이젠 썩어 냄새가 고약해서 나 자신도 참을 수 없단 말이야.”
프란치스코는 물을 따스하게 데워 그 속에 향기 좋은 약초를 섞었습니다. 그리고는 나환자의 옷을 벗기고 함께 간 다른 수사가 환자의 몸에 향기 나는 물을 끼얹어 주는 동안 프란치스코는 천천히 때를 밀었습니다. 때보다 곪아서 흐르는 진물을 씻어냈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물이 끼얹어지고 프란치스코의 손이 닿는 데 따라 그 나병환자의 환부가 기적적으로 치유되어 갔습니다.
더 놀라운 기적은 자기 몸이 나아가는 것을 본 나환자가 놀라 통회하며 프란치스코의 발 앞에 꼬꾸라져 그의 포악한 영혼이 회개하고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나환자는 심하게 흐느끼면서 자기가 하나님을 모독하고 형제들을 때리고 못살게 군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이 일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비로소 피부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자기 손바닥으로 나환자의 피부를 어루만지는 순간 ‘아! 이것이 사랑이다.’라는 것을 몸소 체험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또 진리에 대한 실험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끼리끼리 사랑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상에는 언제나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원수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위 이야기의 나환자는 어쩌면 원수보다 더 사랑하기 어려운 상대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도 사랑해야 합니다. 수사들도 일단 거기까지는 성공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기조차 어려운 사람에게 다가가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그들도 사랑에 성공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나환자가 그들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들은 뒤로 물러났습니다. 서로 사랑하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달랐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결말을 몰랐습니다.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놀라운 결과를 몸소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나환자의 환부가 기적적으로 치유되었음은 물론이요, 그토록 포악했던 나환자가 변화되었습니다. 사랑을 모르던 그가 사랑에 감염되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비는 순간 그와 프란치스코는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보고 사람들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았을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아니 불가능해 보이지만 복음은 여기까지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가 된 사람들은 자연스레 공동체를 이루고 그런 사람들의 공동체는 '산 위의 동네'가 되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고 희망이 됩니다. 교회 개혁의 목표는 세상에 미혹된 몇 사람의 목사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돈의 사용처를 분명하게 밝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권력의 집중과 힘의 남용을 방지하는 것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에 대한 실험의 기록을 남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습니다. 유럽의 큰 교회당들은 텅텅 비어 관광객들의 눈요깃거리가 되었습니다. 식민지 시대의 선교는 잔혹한 수탈의 역사로 드러났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일들은 오늘날까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으로 위장한 인간 욕망의 표출일 뿐입니다. 오래 전 누군가의 글에서 '나에게 프란치스코와 같은 사람 열 명이 있다면 세상을 변화시켜 보이겠다.'라고 말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진리에 대한 실험의 기록을 남겨주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필요한 사람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 진리에 대한 실험의 기록을 남기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 나라는 누룩처럼 부풀어 오를 것입니다.(보이지 않아도)
저는 가끔 상상을 해봅니다. (설득해도 듣지 않는) 문제가 있는 교회 목사님에게 축복의 말을 남기고 모든 성도들이 다 그 교회에 출석을 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물론 그렇게 되면 참 통쾌하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일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상상할 수 있는 일은 그 목사님을 추종하는 분들과 눈물의 이별을 하고 그 목사님이 스스로 깨닫고 변화할 때까지 따로 모여 예배를 드리면서 그 교회와 목사님과 그 목사님을 추종하는 분들을 위해 '눈물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일은 불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득권을 포기하는 일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자기를 부인하는 일에 비하면 아주 작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일은 놀라운 변화를 촉발할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한 개혁 정도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보고 '이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진리에 대한 실험의 기록을 남기는 사람들에 의해 교회 개혁이 아니라 사랑의 혁명이 일어나기를 고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