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마음과 신앙 (약 3:14-16) 2014년 3월 23일
마음
라틴 아메리카 빈민들의 위대한 대부였던 브라질의 카마라 대주교가 타계하기 몇 해 전, 캘리포니아 버클리의 한 교회에서 강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강론을 마쳤을 때, 그는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신부님은 암살 위협도 받으셨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조직적 압력, 정부의 폭압도 겪으셨을 뿐 아니라, 심지어 교회 안에도 신부님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가장 다루기 어려웠던 적은 무엇이었습니까?”
대주교는 말없이 손을 들어 머리 위로 천천히 원을 그리다가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습니다.
“나 자신이 나의 가장 고약한 적입니다. 가장 다루기 힘든 상대이지요. 바로 이 가슴팍이 평화를 위한 내 투쟁의 가장 격렬한 전쟁터입니다.”
마하트마 간디도 가장 큰 적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영국인들 그리고 자신의 반제국주의 투쟁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그 다음 자기 민족에 대해 성찰하면서 인도 내에 만연된 불가촉천민에 대한 차별과 편협함, 폭력에 대한 자신의 투쟁을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자기 안에 있는 폭력과 이기심과 불완전함에 대하여 말하고 나서 이들 가운데 맨 나중 것이 가장 큰 적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적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을 끝맺었습니다.
사실 우리의 마음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품을 듯 하다가도, 한 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없는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정말 입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입니다. 문제는 그런 현상을 사람들이 평소에는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에게 떠 오른 생각이 자신의 그런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당연한 것이요, 합리적이라 여겼던 것이 나중에 보면 잘못된 마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개는 성급했거나 도에 지나도록 거칠거나 사나워 감정에 치우쳤을 뿐 아니라 근시안적이었다고 판단됩니다. 그래서 지난 후에는 후회를 하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삶의 기회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자신의 그런 모습을 알게 되는 것이야말로 정말 큰 주님의 은혜요 은총입니다.
말기 암으로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은 그런 면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고 깨닫게 합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자신이 평생 가지고 살던 마음을 버리고 늘 자기 안에 있었지만 보지 못하고 따르지 못하던 마음을 보고 그 마음을 따르는 것입니다. 남은 몇 시간을 맛난 음식을 즐기듯 음미하며 살다가 기꺼이 죽음을 맞는 그 모습이 타산지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은 형장으로 끌려가기 전의 사형수에게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자신으로 인해 상처입은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모습도 과거의 잘못되었던 자신의 마음을 보고 그것을 버리고 새롭게 깨달은 자신의 마음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들은 대개 삶의 기회가 끝나가는 거의 마지막 시점이 되어야 그걸 깨닫습니다. 어쩌면 그것 또한 흔들리는 그 마음 덕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깨달은 당사자에게도 의미가 있고 보고 듣는 우리에게도 인상적인 이유는 알 수 없는 우리 마음 가운데 평소에 인식할 수 없었던 뭔가 진실한 실체가 있다는 사실을 보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저는 2000년도 1월 목회자 영성 수련회라는 모임에 참가했습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한 프란치스코회 신부님으로부터 '렉시오 디비나'(거룩한 독서)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전래의 기도 방법이라는 설명과 함께 들은 그 강의에서 처음으로 그동안 해왔던 기도와는 전혀 다른 기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관상기도라는 말도 듣고 따라 해보게 되었습니다. '주여 삼창 기도'가 기도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저에게 그것은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었고 아마도 제가 다른 목사들과 다른 길을 걷게 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도 저는 관상기도만이 참된 기도라고 생각하거나 영성 훈련만이 이 시대 타락한 교회들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길이라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관상 기도와 렉시오 디비나를 통해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제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와 방법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감추어진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은 속이는 자인 마귀의 속임수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첫 걸음입니다. 그래서 저는 늘 그리스도인들도 마음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던 세이비어 교회를 통해 더욱 더 큰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세이비어 교회를 이끌어가는 힘은 물론 성령님이시지만 세미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은 관상 기도입니다. 세이비어 교회의 정회원은 누구나 일 년에 한 번 이상 피정을 하도록 서약을 하고 그것을 지키고 있습니다. 피정이란 '피세정념'(避世精念)을 줄인 말로 분주한 세상일을 피해 마음을 정리한다는 의미입니다. 세이비어교회의 창립지도자인 앤목사는 관상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일치를 추구하고 '내려놓음'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는 훈련을 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세이비어교회의 모든 사역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세이비어 교회를 통해서도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 마음을 정리하고 극복한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 얼마나 결정적인 일인가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독한 시기와 다툼
야고보 사도는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14)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말씀'과 '말'의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심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믿는 사람의 온유함을 통해 말과 행실로 드러납니다. 만일 온유함이 없다면 그가 하는 말들은 그의 마음에 심긴 말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지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혜가 있다고 하면서 말을 하는데 거기에 온유함이 빠져 있다면 그 지혜는 마음에 심긴 말씀과 다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것을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심지어 마귀적인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마음에 심긴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말은 그 마음에 심긴 말씀의 지배 아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마음에 심긴 말씀이 곧 위로부터 오는 지혜입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신 뜻이고 진리의 말씀이며 새 언약의 복음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심겨 있을 뿐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위로부터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심긴 말씀은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로 계속해서 새롭게 되고 확연히 드러나며 살아서 역사합니다.
단지 심겨 있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풍성히 주시는 온전한 선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마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말은 독한 시기나 다툼의 마음이 아니라 온유함 가운데 그 심긴 말씀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독한 시기나 다툼이 있다면 "자랑하지도 말고 진리를 거슬러 거짓을 말하지도 말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독한 시기나 다툼을 가지고 입을 열어 자랑하거나 거짓을 말하게 되면, 그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훼방하고 자신의 삶은 물론 온 세상에 지옥 불을 옮겨 붙이는 것입니다.
말씀이나 지혜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머물다가 성도의 말을 통해 씨앗처럼 삶 속에 그리고 이 세상 속에 뿌려집니다. 당연히 거기서 의의 열매, 화평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온유함을 떠나 독한 시기나 다툼에 휩싸인다면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때 말을 하게 되면 그 결과는 이미 여러 번 말씀드린 것과 같이 지옥의 현실화입니다. '독한 시기'(젤론 피크론)라는 말에서 '독한'이란 맛이 쓰거나 먹었을 때 속이 뒤집히고 쓰릴 만큼 씁쓸한 것을 뜻합니다. 정욕이 잘못된 대상을 향하여 잘못된 방식과 목적으로 격동되어 독초와 같은 시기의 말들을 쏟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다툼'(에리테이아) 역시 만만치 않은 표현입니다. 이는 '경쟁적 주도권을 쥐기 위한 개인적 야심'이나 그것 때문에 자꾸 분리하고 나뉘려는 태도입니다. 이기적인 욕망 때문에 각을 세우고 분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편을 가르고 등을 돌리는 일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그런 독한 시기나 다툼이 마음을 장악했을 때에는 무슨 자랑이나 거짓을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뻔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옥 불이 옮겨 붙어 타는 형국이 될 것입니다. 자신의 그러한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다면 그렇게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분열을 항하여 나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와 같은 마음의 쓴뿌리로부터 나오는 말들을 하나님의 지혜라고 주장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적, 정욕적, 마귀적
독한 시기와 다툼과 같은 것으로 가득 찬 마음에서 나오는 것을 지혜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결단코 위로부터 오는 지혜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도리어 땅에 속한 것이고, 인간의 육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며 한 마디로 마귀적입니다. 세상적이라는 말은 땅에 속했다는 의미로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땅에 속한 것은 위로부터 오는 것처럼 변하지도 않고 속이지도 않는 온전한 선물이 될 수 없습니다. 온전하지도 않고 변질되며 속이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인간의 잘못된 욕심을 따라가다가 얻는 것들이 바로 그러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육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욕에 따라 뜻을 품으면 대체로 죄를 낳고 사망에 이르는 방향으로 갑니다. 곧 마귀의 거짓된 말에 속는 것입니다. 마귀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짝하지 못하는 지혜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진리의 말씀이나, 마음에 심긴 말씀과도 어울릴 수 없는 지혜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세상적이고 속이는 지혜, 사람의 부패한 심령에서 나오는 책략이나 죄를 도모하려는 속임수나 꾀에 해당합니다.
요란과 모든 악한 일
그 길을 택했을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결과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들입니다. '요란'이라는 말은 '정함이 없다'(아카타스타시아)는 의미입니다. 정함이 없다는 말은 나뉘고 흔들려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정함이 없고, 개역한글 성경은 그것을 요란이라는 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 단어는 1장 8절에서 우리가 보았던 바로 그 단어입니다. 두 마음을 가진 자의 특성을 야고보 사도는 정함이 없다고 표현했습니다. 결정을 못하거나 마음에 계속적인 꺼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구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신이 구하는 것을 실제로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고 있지도 않가 때문입니다. 그런 자는 받지 못합니다. 마음이 나뉘었고, 그 두 마음이 치유 받는 것이 그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뉜 마음의 상태에서는 모든 악한(파울론) 일들이 넘치게 됩니다. 선하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께로부터가 아닌, 다시 말해 위로부터 주어진 것들이 아니므로 불법하고 무질서하고 어긋난 것들이며 쉽게 변질되고 속이며 부패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지혜가 날카로운 창을 든 빨간 모기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아무도 그것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의 선악과처럼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합니다. 맛도 좋을 것 같고 갈증을 해소해 줄 것처럼 보이고 그걸 가지고 있기만 해도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 지혜는 끊임없이 우리가 따르고자 하는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가리키며 어리석다고 외쳐댑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두 마음으로 나뉘어져 있지 않다면 그것의 실체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일어나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들을 볼 수 있고 사망으로 향하는 그 길을 끝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의 마음은 나뉘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나뉘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온유함으로 우리 마음에 심긴 말씀을 따르고자 하여도 그 유혹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놓는 그 순간 우리는 불식간에 다시금 나뉜 마음이 되어 세상적이고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그 지혜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끝까지 경성하는 자만이 위로부터 난 지혜를 따라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여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합니다.
내면을 향한 여정과 세상을 향한 여정
우리의 신앙 여정은 내면을 향한 여정과 세상을 향한 여정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영성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종교생활을 무척 열심히 하는 데 반해 진정한 영성이 없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축복이 아니라 돈, 건강, 사업, 출세 같은 세속적 욕망을 추구하는 기복 신앙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아주 좋고 신앙생활에 열심인 사람일수록 영성과는 거리가 먼 아집, 독선, 편견이 가득 차 있는 모습을 흔히 보게 됩니다. 남의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도 않고 입에 거품을 물고 얼굴에 독기마저 품고 열심히 자기 이야기만 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게 됩니다. 영성은 고사하고 일반적 상식과 도덕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절망 그 자체입니다.
교회의 모습 역시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뉴스를 통해 보도되는 기사를 접할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처음에는 분노가 일기도 했지만 그런 모습이 여기저기서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다 못해 한국교회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니 분노조차 사라져버렸습니다. 온갖 탐욕과 비리가 판을 치고 있지만 누구도 그 성역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교권 다툼과 이권 다툼이 끊이지 않아 세속 법정을 제 집처럼 드나듭니다. 오죽하면 판사들이 교회 문제를 제발 법정으로 끌고 들어오지 말라고 말하고 목사님들 제발 거짓말 좀 하지 말라는 애원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도 고소고발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말씀대로 불의를 당하지 않고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무엇보다 평화를 이루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근본적인 이유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적, 정욕적, 마귀적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자신의 마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독한 시기와 다툼으로 가득 차 있는 그 마음을 보지 못하고 그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그가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자신은 물론 이웃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오직 요란과 모든 악한 일들이 충만해질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눈으로 목격하고 있습니다.
세이비어 교회는 '내면을 향한 여정'과 '세상을 향한 여정'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개인의 영성과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합니다. 150여 명의 작은 교회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그토록 엄청난 일들을 해내고 개인주의가 판을 치는 미국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그 두 기둥이 조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내면이 부실한 사람이 세상을 위한 여정을 제대로 갈 수가 없습니다. 내면으로의 여정만을 중시하고 세상과 동떨어진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내 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 내가 쓸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고 늘 깨어 기도할 때에라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대인 관계를 통해서 드러나야 합니다. 그 모습은 독한 시기와 다툼이 아니라 긍휼과 연민 속에 드러나는 이해와 사랑의 모습일 것입니다. 거기에 미움과 증오는 들어설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같은 방향으로 항해하는 선원(나그네)들입니다. 나뉘지 않은 마음은 바로 그런 마음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께로 향하여 일치된 마음을 구하면서 우리 마음에 심긴 말씀에 따라 우리의 삶을 주님께 드리는 그분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