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신앙글)

[스크랩] 가장 무서운 타락

J_카타리나 2014. 3. 6.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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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 중에 하나는 예수님께서 막말을 하시거나 독설을 하시는 부분입니다. 사랑이 많으신 그분의 입에서 그런 말들이 나왔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당혹감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저주의 발언을 서슴지 않는 장면에 이르면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이 스스로 모순된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생각이 들어도 그분이 왜 그렇게 험한 말을 하셨는가에 대해서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런 생각 자체가 그분을 모독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매우 신앙심이 깊은 태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태도입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 정직해야 합니다. 의문이 들면 회의할 수도 있고 믿어지지 않으면 고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 이유를 생각해야 하고 이해는 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같은 잘못된 신앙의 습관을 가지게 된 것은 우리의 교회들 안에 만연되어 있는 '우민화'의 증상이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인간 역사 속에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 타락의 가장 명확한 특성은 지배와 억압입니다. 그런데 지배와 억압은 반드시 인간성을 말살합니다. 특히 인간의 이성을 심각하게 훼손하여 정상적인 사고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결과적으로 비정상적인 인간이 되어 정상적인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하지못하게 됩니다. 그러한 현상을 '우민화愚民化'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독재와 억압에 갇혀 있는 나라 국민들의 모습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의 동포인 북한 사람들이 마치 이성이 마비된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은 것은 그들이 억압과 감시를 통해 늘 지배를 당하면서 인간성이 깨지고 말살되었기 때문입니다. 과장된 모습으로 호들갑을 떨거나 충성을 맹세하고 눈물을 철철 흘려가며 감격스러워 하기까지 합니다. 그 모습이 바로 짓눌려 찌그러들고 깨어진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모습이 오늘날 한국교회 교인들의 모습과 흡사하다는 것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북한 주민들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과장된 모습 그것이 바로 '우민화'된 사람들의 전형입니다.

 

'우민화'의 뒤에는 반드시 독재자가 존재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뒤에 영적인 힘을 독점하고 권력을 휘두르던 성전체제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우민화'의 뒤에는 힘과 권력을 휘두르는 제도와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하신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왜 경건하고자 노력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그토록 심하게 질타하시고 심지어 저주까지 퍼부으셨던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 23:3-7)

 

결과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는 실천과 책임을 강요하면서 자신은 전혀 실천하지 않는 것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모든 행위와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모든 일들이 다 그들이 맡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화하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약3:1)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은 마음의 부패로 이어지고 그것은 곧 말의 타락으로 이어졌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타락은 말씀의 타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타락되면 인간은 구속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잃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그토록 심한 말을 퍼부으신 것도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타락하면 모든 것이 다시금 새로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 이스라엘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의 담지자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새로운 공동체에는 선생과 지도자와 아비가 없어야 합니다. 우리의 지도자와 스승은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동등한 형제요 자매일 뿐입니다. 큰 자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큰 자라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섬기는 자라는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섬기는 자는 종입니다. 하인입니다. 손님을 모시는 종업원입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고객이 명하는 대로 따르는 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는 자가 될 것입니다.(마태복음 23장 참조) 

 

8백 년 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내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교회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세웠습니다. 다 무너져가는 교회(다미아노)를 다시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가 세운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교회가 그분의 교회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되는 사명 또한 동일합니다. 그분의 교회를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물론 성인이라 불려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프란치스코의 행적을 돌아볼 때 우리는 시작도 하기 전에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놓고 그의 아버지를 떠나기 전까지의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는 우리와 거의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자들에게 동정심을 보이는 평범한 젊은이였습니다. 그가 달라진 것은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을 때부터입니다. 그 이후 그의 삶을 이끈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누구이건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사람의 삶은 초자연적이고 탈인간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은 그러므로 평범한 우리들에게도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프란치스코처럼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 때, 그와 같이 가난의 길을 걷기 시작할 때 우리 앞에는 새로운 길이 열릴 것입니다. 프란치스코가 그에게 맡겨진 사명, 곧 그분의 교회를 건설하는 일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 일을 담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워진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교회일 것입니다.

 

말씀의 타락은 분명 가장 무서운 타락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역사에 참여하는 프란치스코와 같은 사람이 있는 한 그것은 다시 회복될 수 있으며 그분의 교회는 반복해서 다시 이 땅에 세워질 것입니다.

출처 : ♡어지니♡
글쓴이 : 늘 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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