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영원한 생명 (요3:14-15) 2012년 1월 15일
구원에 관한 심각한 오해
며칠 전 친척의 장례식을 다녀왔습니다. 유족들이 제게 다가와 기쁘게 말했습니다. "주님 영접하고 돌아가셨어요." 제가 목사라는 것을 알고 제게 다가와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장례식장에서 언제나 마주치게 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살아 있을 때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죽은 후에는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구원에 대한 확신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토록 고인의 천국행을 확신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과연 고인이 되신 분들은 천국에 가신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누구도 이렇다 저렇다 확실하게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들이 구원에 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구원이란 단순히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느냐 못 가느냐를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구원 이해는 왜곡되어 있다고 말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학적인 관점의 차이가 아닙니다. 인간의 이기심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아니면 자신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약간의 성의를 보이는 것으로 대가를 치를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믿어주는 것이 마치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양 선심을 씁니다. 하지만 그것은 믿음도 구원도 다 알지 못하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몇 주 전 말씀을 통해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통해 거듭남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거듭남이람 위로부터 주어지는 생명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위로부터 주어지는 생명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그것은 곧 구원 받지 못한다는 의미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구원이란 위로부터 주어지는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중생한 삶은 이제까지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입니다. 그 전혀 다른 삶이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되어야 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도 그분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삶과 구원은 당연히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께서 구원자이시고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분을 따름으로써 그분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은 곧 새로운 시작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따름으로써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얼핏 들으면 신성모독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는 일야말로 우리에게 부어진 새로운 생명의 역사이고 우리의 구원이 참이라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1:4)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것은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사후 천국"으로 요약되는 오늘날 기독교의 구원에 관한 오해를 불식시키는 일이야말로 다른 모든 일에 앞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전혀 변화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도, 이 시대 교회들이 타락의 길을 걷는 것도 그 근본적인 시작은 바로 이러한 구원에 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새로운 삶이며 개인의 변화를 넘어 반드시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적인 정의로 이어지는 하나님 나라와 연관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은 결코 "사후 천국"이라는 교리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구원에 관한 심각한 오해입니다. 구원은 사후 천국에 앞서 지금 이곳에서의 삶이 하나님나라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죽은 후에 가는 나라가 아니라 살아서 들어가야 하는 나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고 말하는 삶의 의미입니다.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오직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전 10:31) 사는 삶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영생,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에게 부어진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생명의 복음서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생명에 대한 신학을 전개합니다. 요한복음을 쓴 궁극적 목적은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믿음으로써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생명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생명과 관련된 단어가 많이 언급됩니다. '살다'라는 동사 '자오'가 17번, '생명'이라는 명사 '조에'가 36번 나오는데 이 둘을 합친 숫자는 신약성경 가운데 다른 어떤 책보다 많습니다. 그래서 생명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언급하는 요한복음을 학자들은 '생명의 복음서'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은 생명이라는 말로 시작하여 생명이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1장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라고 시작하여 20장 31절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로 끝을 맺습니다.(물론 요한복음은 21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21장은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거의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
우리말 성경에서는 구분되지 않지만 요한복음에서 생명과 목숨은 구별되어 사용됩니다. 생명을 가리키는 단어는 '조에'이고, 목숨을 가리키는 단어는 '프쉬케'입니다. 조에는 영적 생명을 가리키고, 프쉬케는 육체적 생명을 가리킵니다. 두 낱말의 차이는 명확합니다.
"자기 생명(프쉬케)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프쉬케)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조에)하도록 보존하리라."(12:25)
여기서 드러나는 분명한 진리는 '프쉬케'는 임시적이고 찰나적이지만 '조에'는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조에'는 '영원한 생명'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영원함의 생명' 곧 영생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조에', 곧 생명을 36번 쓰고 있는데 이 가운데 17번은 '영원함'이라는 단어 '아이오니온'과 같이 쓰고 나머지 19번은 '조에'만 나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조에'는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라는 표현을 선호한다면, 같은 의미로 공관복음서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을 선호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이 공관복음서 안에 대략 70번 나오는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두 차례만 나옵니다.(3장5절과 7절) 반대로 요한복음에는 생명이 32번 나오는데 공관복음서에는 14번이 나옵니다.
요한복음이 '하나님 나라'보다 '생명' 또는 '영원한 생명(영생)'이라는 개념을 선호한 것은 네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앞으로 언젠가 그 나라에 들어간다는 의미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영생을 얻는다'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우리가 미래에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영생을 이미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는 유대교 전통에서 나온 개념이기 때문에 헬라 출신 그리스도인들한테는 낯설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에 그 근원을 둔 '생명' 개념을 사용한 것입니다. 물론 구약성경에도 영원한 생명이라는 단어가 나오지만 지혜서에서만 네 번 나올 뿐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 나라 개념은 외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 이유는 정토나 극락과 같은 불교식 사고가 무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고, 천국이나 천당 또한 하늘에 있는 낙원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을 때는 공간적 지리적 의미보다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체적 주권 행사, 구속적 통치에 대한 의미가 더 컸습니다. 그래서 불트만 같은 신학자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를 하나님의 통치로 바꾸는 것이 신자들에게 오해를 줄여주는 방편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셋째,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은 자칫하면 외적인 것(공간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반면, 생명은 내적인 것, 곧 구원의 내면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해하는 것은 따라서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게 합니다. 행위는 '자기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내면의 변화는 존재의 변화로 이어질 뿐 아니라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구원의 참된 의미를 구현하게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요한복음의 독자들은 이미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한 이들,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들로써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해 말함으로써 인내와 용기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가장 늦게 기록된 복음서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이 기록된 시점에는 이미 기독교와 유대교의 분리가 이루어졌기에 예수님에 대한 신앙 때문에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회당에서 쫓겨나고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미 그들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이 있기에 그들은 견뎌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보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무엇인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익숙하게 받아드리고 쓰고 있지만 사실 영생은 인간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실재이기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단어입니다. 방금 전에도 살펴본 것처럼 영생이란 단어가 하나님 나라와 교체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처럼 단순히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라는 개념과는 다른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현재의 상태에서 아무런 변화 없이 죽지 않는 존재가 된다면 어쩌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또 그런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결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정답게 놀던 중 어느새 하루해가 저물고 있었습니다. 메뚜기는 하루살이에게 "하루살이야, 오늘 참 재미있게 놀았어.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또 만나자." 그러나 내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하루살이는 메뚜기에게 내일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 메뚜기는 "캄캄한 밤이 지나가고 아침 해가 밝아오면 그날이 내일이란다." 메뚜기의 말을 이해할 수 없던 하루살이는 메뚜기가 엉뚱한 이야기를 꾸며내 자기를 놀린다 생각하고 화가 나서 다른 곳으로 날아갔습니다.
다음날 메뚜기는 개구리를 만나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며칠을 신나게 놀고 나서 개구리가 메뚜기에게 말했습니다. "메뚜기야, 날씨가 추워졌구나. 이제 그만 놀고 내년에 다시 만나자." 내년이 무엇인지 모르는 메뚜기는 눈이 휘둥그래져 내년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개구리가 "내년이란 것은 추운 겨울을 보내고, 먼 산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따스한 기운이 오는 때를 말한단다."하고 말했습니다. 개구리가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할 수 없던 메뚜기는 개구리가 자기를 놀린다 생각하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습니다.
메뚜기는 하루살이에게 내일을 설명해줄 수 없습니다. 개구리는 메뚜기에게 내년을 설명해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을 모르는 우리에게 영생을 설명해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생이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런 우리에게 요한복음은 영생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영생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언젠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지금 여기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 누리는 생명을 가리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3)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영생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반복해 말하지만 영생은 단순히 미래에 주어질 것이 아닌 지금 이 순간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영생이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기자는 그것을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줍니다.
"영생은 곧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이 구절을 보면 영생이란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믿는 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 사랑의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안다'라고 쓰인 단어의 성경적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이 구절에서 '안다'라는 단어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훗날 천국에 가서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그분을 아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과 정신과 느낌으로 상대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이요, 나 자신을 상대에게 완전히 내어드려 귀속시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온전히 결합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 25절의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여 그가 아들을 낳아"라는 말씀이 있는데 거기서 동침하였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야다'인데 이는 '알다'라는 동사입니다. 여기서 '알다'라는 것의 의미는 아담이 지성적인 차원에서 그의 아내를 알았다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깊은 일치를 통해 아내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생이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알고 그분들과 일치하여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확인시켜주는 말씀이 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56)
이 두 구절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 역시 영생이라는 것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생이란 예수님과 우리가 갈림이 없이 일치되어 있는 상태임을 가리킵니다. 영생이 바로 그러한 상태이기 때문에 처음에 말씀 드렸듯이 사도 바울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베드로 역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삶
영생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고 그것이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과 일치하는 삶,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 성령에 이끌림을 받는 삶이라면 영생이 있는 사람의 삶과 영생이 없는 사람의 삶이 같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해 구원 받기 전의 삶과 구원 받은 후의 삶이 같을 수 있겠습니까?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단순히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는 것일 수 있겠습니까? 답은 모두 '아니요'입니다. 영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삶이 같을 수 없습니다. 구원 받기 전의 삶과 구원 받은 후의 삶이 같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삶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일까요?
그것을 알고 배우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공부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담겨 있는 그분의 마음을 보고 그분처럼 살기 위해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여러 번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구원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구원 받은 개인은 결코 개인적으로 살 수 없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르침과는 많이 다른 내용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구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가 없도다.(For none of us lives to himself alone and none of us dies to himself alone.)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If we live, we live to the Lord; and if we die, we die to the Lord. So, whether we live or die, we belong to the Lord.)"(롬14:7-8)
우리말 성경보다 영어로 이 구절을 살펴보면 뜻이 보다 강해집니다. 그래서 NIV 성경을 함께 말씀드렸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none of us!!)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죽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 모습을 생각한다면 그들 가운데 단지 몇 명만이라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섞여 있다고 해도 그 교회는 정말 놀라운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 아무도 그렇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는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들은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살든지 죽든지 자신들이 주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은 것이 무엇이며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들이 주님께 속해 있다는(belong to the Lord!!)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들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그들은 그렇게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구원 받은 우리는, 우리가 정말 구원 받았다면 절대로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영생이며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 삶은 반드시 사회적인 모습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관계상 오늘은 그 내용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늘 강조해서 말씀드리고 있는 것들, 즉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 약자를 보호하는 일 그리고 사람들을 그렇게 만드는 구조적인 사회체제에 저항하는 일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희년이 선포되는 그런 일들이 바로 그러한 삶에 관한 촉구라는 것을, 그것이 결코 제가 유난을 떠는 것이 아니라는 걸 오늘의 말씀을 통해 이해하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결국 구원이란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하나님께서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우리들을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사랑으로 반응하는 것이 우리들의 예배이며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질 우리의 신앙입니다.
구원이란 그렇게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인 형제와 자매들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이웃들과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피조물들과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3세기 이레니우스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은 모든 피조물이 충만하게 생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빚어지고 준비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중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주님께 속한 주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