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신앙글)

[스크랩] ★ 복음이란 무엇인가?

J_카타리나 2008. 8. 21.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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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기본적인 질문을 다시 해야할 만큼 오늘날은 복음에 대한 인식들에 많은 문제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복음이라 하면 무조건 행위와는 관계없는 어떤 해방선언서 같은 것으로 오해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믿음의 대상이지 행위의 대상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렇게 된 것은 복음의 빛이 가리워지고 의식이 신앙행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던 로마 카톨릭 시대의 후유증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 특히 복음서를 본다해도 행위가 많이 강조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마7:21)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열매를 많이 강조하셨슴을 보게 됩니다.(마7:19)
심판은 "행한대로 "되어진다고도 하셨습니다.



복음서나 그 복음을 해설하고 있는 사도들의 서신 어느 곳에서도 행위를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곳은 없습니다. 다만 바울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구원은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무엇, 즉 자기의 선행이나 율법적인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려고 했기 때문인 것이지 그리스도안에서는 아무 행위가 필요없다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심지어 바울은 "복음에 복종치 않는 자는 형벌을 받는다"고 했지 "복음을 믿지 않는자가 당한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도 복종이라는 행위의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또 바울은 "우리들 처럼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빌3:17)고 하면서 행위가 따르지 않는 말로만의 믿음을 경계했습니다.


복음은 행위무용론을 설파하는 관념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의 인식으로 부터 시작해서 삶의 전 영역에 이르기 까지의 변화를 역설하고 있는 강력한 명령입니다.


이러한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복음에 대한 참된 인식이 필요합니다.


복음은 본래 "유앙겔리온"이라고 하는 데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신약에서 이 말씀을 제일 먼저 사용하신  분은 다름아닌 예수님 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단강 세례와 광야 시험을 거친 후 제일 먼저 고향 나사렛에 가셨는 데 그 때 회당에서 이 말씀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눅4장 18절을 보면 그 때 예수님은 지금의 이사야 61장을 펴서 읽으셨습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 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본문을 인용하실 때 예수님은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구절을 "유앙겔리온" 즉 우리 말로 "복음"이라고 읽으신 것입니다. 여기서 이사야가 예언한 "아름다운 소식"이 바로 "복음"의 다른 이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역시 로마서 10장에서 복음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도다."(롬10:15)


바울이 인용한 말씀 역시 이사야 52장 7절의 내용인데 그곳에서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를 인용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사야가 말한 <아름다운 소식> <복된 소식>이 예수님이 설파하신 <복음>의 원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시대의 배경을 이해할 때 복음의 의미를 더 한 층 잘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히 이사야는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의 귀환을 희망하면서 이 "복음"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에게나 팔레스틴 땅에 남겨진 이스라엘 백성에게나 남(이민족)의 통치를 받는 것은 불행이요 비극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결같이 고토귀환을 기다렸고 하나님의 직접통치국인 메시야의 나라를 희구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시오니즘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어느날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파발이 왔습니다. 백성들은 기뻐서 까무라쳐질 정도였씁니다.  이 소식이 그렇게 기쁜 이유는 그 동안 원수같은 이민족의 통치를 받으면서 너무나도 괴로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소식은 글자 그대로 복된 소식이요 아름다운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그 파발꾼은 신이나서 이산 저산을 넘어다니면서 백성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끔은 원수들에 의해 이 복된 소리를 전하지 못하도록 제지도 당했습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그 소식을 전합니다. 그러한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바울은 이사야가 예언한 그 메시야의 시대가 비단 이스라엘 땅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차원으로 도래했음을 간파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 소식의 파발꾼으로서 선택받았음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요, 천국이며 이 소식을 전하는 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이제부터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선포입니다. 그러나 그 통치는 메시야를 통한 간접통치입니다. 본래 이 통치는 첫째 아담에게 부여되었던 신성한 의무요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격을 상실함으로 말미맘아 두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에게 위임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는 먼저 자기 백성들을 깨끗케 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다스리기 위해 성령(다른 보혜사)으로 오셨습니다.


성령으로 오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다스려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룩한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 즉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는 자들인 것입니다. 옛날엔 사단의 다스림을 받고 자신의 뜻대로 자행자지하였으나 이젠 온전히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드려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법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이 있지만 신약시대엔 그리스도의 법이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거하리라."(요15:10)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3;24)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5:3)


주님의 계명들은 사실상 율법보다 더 어렵고 무거운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면 살인죄가 되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법으로는 미워만 해도 살인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는 성적인 접촉이 없었으면 간음죄가 되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법으로는 마음만으로 음욕을 품었어도 간음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계명이 무거운 것이 아닌 것은 성령께서 능히 지킬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주님의 백성들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믿음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행위를 둘다 선포하는 것입니다. 심판은 믿음여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우리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살후1:8) >

 

- 글: 갈렙 -

천상의비밀 요르단(Jordan) 강 *^-^*
출처 : 천상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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