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 그 분은 하느님의 아들
루가 18, 9-1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나의 예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 예화의 바리사이는 실제로도 윤리적으로 훌륭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는 유다교인으로서 지킬 것 다 지키고 바칠 것도 다 바쳤습니다. 유다교가 요구하는 단식은 일주일에 한 번인데 이 사람은 두 번이나 단식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다교가 요구하는 십일조는 주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인데 이 바리사이는 자기의 부수입까지 포함한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쳤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지키고 바치는 일에 있어서는 나무랄 데 없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감동하실 일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그 시대 공인된 죄인으로 모든 이의 지탄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자비를 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의 말씀을 열심히 신앙생활하고도 겸손 하라는 교훈으로 축소이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예화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열린 하느님의 지평에 우리를 인도합니다. 인류역사 안에 신(神)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모두 신이 준 계명을 잘 지키고 제물을 바쳐서 신으로 하여금 호감을 갖게 해서 소원성취 하라고 권합니다. ‘태초에 두려움이 있었고 이 두려움이 사람들로 하여금 신을 생각하게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에게 무엇을 바쳐서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어떤 혜택을 받아 내겠다는 민속 종교들의 발생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정화수를 떠놓고 빌던 그 마음의 연장이고, 공양미 삼백 석을 바쳐 아버지가 눈을 뜨는 혜택을 받게 한 심청이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초월적 힘을 빌려 소원성취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인간이 소원성취 하는 길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신앙은 내가 잘 지키고 잘 바쳐서 하느님을 감동시켜 그분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아내어 나 한 사람 잘 되고 잘 사는 길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소원성취는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 당당하게 해야 합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의식하고 그분의 일을 자유롭게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비는’ 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셔서 우리 안에 하느님의 자비와 불쌍히 여기심이 흘러넘치게 하는 데에 신앙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비롯해서 모든 것을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베푸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베풀어진 것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려 합니다. 잘 지키고 잘 바쳐서 소원성취 하겠다는 것은 독재자 밑에 사는 기쁨조가 바라는 일입니다. 혹은 조폭조직의 두목 밑에 사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주어진 여건에서 최대의 혜택을 받겠다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믿으신 하느님은 그런 독재자도 아니고 조폭의 두목과 같은 분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을 배경으로 자기 한 사람 강자가 되어 잘 살아보겠다는 호칭이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 주는 하느님이십니다. 그 생명을 배워서 살겠다는 아버지라는 호칭입니다.
그 아버지의 일을 실천하신 예수님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말할 때는 어머니와 대립된 아버지를 뜻하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자녀를 낳아 기르고 그 자녀가 사람노릇 하도록 가르치는 아버지를 의미합니다. 옛날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자녀들과 관련지어 아버지를 말할 때는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역할도 당연히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생명을 주신 분, 아버지의 배려로 생명이 성장할 수 있고, 자녀가 아버지의 생명을 연장하여 산다고 말할 때, 아버지라는 호칭 안에는 어머니도 항상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실 때,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를 위해 하신 일과 같은 역할을 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버리지 않고 용서하며 돌보듯이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 부모가 우리를 불쌍히 여겼듯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 부모에게서 세상에 사는 법을 배웠듯이 우리가 배워서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하느님이라는 뜻이 들어 있는 아버지라는 하느님에 대한 호칭입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에서 바리사이는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기가 잘 한 일에 만족하고 하느님께 그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한 일에 도취되어 자만자족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는 우리들이 흔히 하는 자만자족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우열(優劣)을 논하라고 주어진 우리의 삶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우리의 경쟁자가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이웃이며 하느님이 주신 형제자매들입니다. 사심 없이 깊이 들여다보면 사람은 모두 불쌍합니다. 그 앞에서 우리가 가지는 우월감도 열등감도 현실을 바로보지 못한 잠시의 착각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리는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실 것을 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와 세리 두 사람 중에 의롭게 되어 돌아간 사람은 세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이신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올바른 자세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배워서 사는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의 자비가 자기 안에 가득할 것을 빕니다. 그리고 그 자비를 스스로 실천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빕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죄인이라고 유다교가 버린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을 하느님이 용서하신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당신 주변에 넘쳐흐르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외면하고 나 한 사람 잘 되겠다는 사람이 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를 외면하는 유다교 지도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를 소신껏 실천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생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었습니다.
- 서 공석 신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