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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과 채움에 대한 미학

J_카타리나 2007. 10. 17.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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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호의 소설 상도(商道)에는 계영배(戒盈杯)란 술잔이 나온다. 계영배는 술을 어느 정도 부어도 전혀 새지 않다가 70% 이상 채우면 모두 밑으로 흘러내려 완전히 비는 신기한 술잔이다. 조선시대의 거상 임상옥은 계영배를 늘 옆에 두고 끝없이 솟구치는 과욕을 다스렸다고 한다. 계영배는 우리에게 가득 찬 것은 곧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는 교훈을 준다.
 
지현 스님은 ‘여백의 미’라는 글에서 ‘꽉 차지 않고 조금 비어 있는 듯한 아름다움이야말로 서양에서는 볼 수 없는 동양 고유의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극치라 할 수 있다’고 했다. 더불어 그는 ‘여백의 미는 산수화나 풍류를 즐기는 삶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 안쪽에 자리 잡은, 서두르지 않고 넘치지 않는 여유로움에서 비롯한다. 돈을 많이 벌고자 하는 욕망, 높은 자리에 올라 권세를 탐하고자 하는 욕망이 가득하다면 끝내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고 충고했다. 스님들이 치는 목탁은 속이 텅텅 비어 있다. 목탁의 속이 꽉 채워져 있다면 그냥 나무토막을 치는 둔탁한 소리만 내겠지만 속이 비어 있기에 맑은 울림이 난다. 비움은 다른 것을 채울 수 있다는 채움과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기술이 발달하고 첨단화될수록 그 장치는 오히려 단순해진다고 한다. 기능이 복잡해짐에 따라 필요한 각종 장치들을 간략화함으로써 사용자는 공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비움의 기술’은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테크놀로지를 수용하면서 공간의 여유와 변용을 가져오게 한다. 이런 비움의 철학은 커뮤니케이션에도 적용된다.

법정 스님은 그의 책 『무소유』에서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한마디로 충분할 때는 두 마디를 피해야 한다. 인류 역사에서 사람답게 살아간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침묵과 고독을 사랑한 사람들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빠르게 변하고 발전하는 사회에서 ‘침묵’만을 강요할 수는 없다. 『여자의 수다는 비즈니스다』라는 책을 내 화제를 모은 김난희 작가는 수다를 이렇게 풀이했다.

“수다는 두 가지 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그저 시간을 보내며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고 마음속에 쌓였던 것을 풀어버리는 소비적인 면, 즉 ‘비움’이 하나고 서로 소통을 함으로써 새로운 메시지를 얻어내는 생산적인 면, 즉 ‘채움’이 또 다른 하나다.”
 
비움의 미학을 칭송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채움의 진정성을 말하는 이는 드물다. 그러나 채움의 긍정성은 무시할 수 없고 무시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무언가를 가득 차게 한다는 뜻으로 우리는 흔히 ‘충만’이라는 단어를 많이 쓴다.

비움의 아름다움은 충만함이 있기에 가능하다. 우리는 벼로 가득 찬 들판, 만삭의 부인들, 꽉 찬 돼지저금통 등 충만한 것들을 보면서 채움의 기쁨을 느낀다. 산스크리트 어에는 공(空), 즉 비어 있음을 뜻하는 ‘수냐타’라는 단어가 있다. ‘수냐타’의 원래 뜻은 ‘없음’이 아니라고 한다. ‘수냐타’는 애초 충만, 가득 참을 의미했다. 너무나 충만하기 때문에 더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뜻인 것이다. 채움과 비움은 역설적이지만 동질성이 있다. 비움은 채움의 또 다른 모습이다. 충만의 미학은 절제와 침묵의 미학인 동시에 무한의 표현이다. 무언가를 채울 때는 지혜가 필요하다. 무엇을 받아들일 것인가 선택해야 하고 비울 무엇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회교 신비주의 수도승들이 읽고 연구하는 『더 북』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아무 글씨 없이 백지로만 된 책이다. 지난 1200년 동안 회교 신비주의 수도승들은 그 책을 전수해 오면서 늘 탐독했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를 읽고 연구한다는 게 이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온갖 지혜와 정보가 가득 찬 책 이상으로 그 책을 존중한다.

우주는 많은 별로 가득 차 있는 집인 동시에 빈 공간이다. 삶 역시 비움과 채움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 어떤 것을 채우고 어떤 것은 비울 것인지 생각해 보라. 내가 비어 있는 것만 못한 것들로 가득 차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천상의비밀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