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신앙글)
깨달음, 지식이 아니라 깨달음이죠.
J_카타리나
2007. 8. 7.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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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의 한계
나는 여러분에게 분석과 깨달음의 차이,
또는 정보와 통찰의 차이를 맛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정보는 통찰이 아닙니다.
분석은, 지식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내가 팔에 뱀이 한 마리 기어 오르고 있는 채로 여기 들어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시다.
"여러분, 내 팔에서 꿈틀거리는 뱀이 보입니까?
이 시간에 들어오기 전에 방금 백과사전을 뒤져서 알아냈는데,
러셀의 독사로 알려진 뱀입니다. 물리면 난 삼십 초 이내에 죽습니다.
이놈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좀 알려 주시겠습니까?"
누가 이런 식으로 말해요? 나는 정보는 있지만 깨달음이 없는 거죠.
혹은 내가 술로 나 자신을 망치고 있다고 합시다.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라면
깨달음이 없는 사람이죠. 자신을 망치고 있다는 걸 알지만 그걸 깨달은 건 아닙니다.
깨달았다면 그 순간 중독을 떨쳐 버렸겠죠.
내가 그 뱀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면 내가 그걸 내 팔에서 떼어내지 않았겠죠.
'그것이 나를 통해서 떨어져 나갔겠죠.' 이것이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말하려는 변화입니다.
자기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게 아닙니다. '내가 나를' 변화시키는 게 아닙니다.
변화가
자기를 통해서,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이것이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자기 안에서, 자기를 통해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보이는 거죠.
깨달음 속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거죠.
'자기'가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하고 있다면 그건 나쁜 징조죠.
오래 가지는 못하겠죠. 만일 오래 간다면 그 사람은 매우 완고한 사람이겠고
따라서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하겠죠.
자기 혐오와 자기 불만을 토대로 회개한 사람들은 더불어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누군가가 "순교자가 되고 싶거든 성인과 결혼하라" 했죠.
그러나 깨달음 속에서는 부드러움·자상함·점잖음·개방성·유연성을 유지하면서,
밀어붙이지 않으면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내가 시카고에서 심리학을 공부할 적에 한 사제가 우리들에게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사실 나는 필요한 모든 지식을 갖고 있었죠. 술이 날 죽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또, 정말이지 아무것도 - 심지어 아내나 아이들의 사랑까지도 -
알코올 중독자를 고치지는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나도 처자식들을 사랑하지만 그것도 나를 고치지는 못하죠.
그러다가 어느 날 나는 나를 바꾸어 놓는 한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가랑비가 내리던 그 날 나는 도랑 속에 누워 있었습니다.
나는 눈을 떴고 이것이 날 죽이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난 그걸 보았고 그 후로는 단 한 방울도 입에 대고 싶은 욕구가 없었습니다.
사실은 그 후에도 좀 취한 적마저 있지만 건강을 해칠 정도로 마신 적은 없어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죠. 지금도 그럴 수가 없고요."
이것이 내가 말하려는 것입니다.
깨달음, 지식이 아니라 깨달음이죠.
담배를 지나치게 피우는 버릇이 있던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사실 담배에 관한 별의별 농담들이다 있지.
담배가 사람을 죽인다고들 하지만 고대 이집트인들을 보라구.
아무도 담배를 안 피웠는데도 모두 죽었잖은가." 그런데 어느 날 그는 가슴이 답답해져서
봄베이에 있는 암 연구소엘 갔는데, 의사가 말했죠. "신부님의 허파에 얼룩이 두 군데 있군요.
암일 수도 있으니 다음 달에 꼭 다시 오셔야겠습니다." 그 후로 그는 담배를 건드리지도 않았습니다.
전에는 흡연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던' 것이고, 이제는 그걸 '깨달은' 것이죠.
그게 다른 겁니다.
우리 수도회의 창시자인 이냐시오 성인은 이 점을 잘 표현했습니다.
진실을 맛보고 느끼는 것 - 아는 것이 아니라 맛보고 느끼는 것, 느낌을 얻는 것 - 이라고 불렀죠.
느끼게 될 때 달라집니다. 머리로 알 때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 앤소니 드 멜로 신부 -
....................................................................
내 안의 다른 나와의 전투에서의 패배는
사는 게 힘들게 느껴지게도 하고
사는 게 아무 의미 없게도 만들고
우울의 나락으로 밀어 넣기도 하고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 조차 없는 무기력한 인간으로 만들기도 하고
심지어 내 자신을 혐오하게도 만들죠.
바로 이것이 지식이 가져다 주는 속임수죠.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이사야40:31)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분석과 깨달음의 차이,
또는 정보와 통찰의 차이를 맛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정보는 통찰이 아닙니다.
분석은, 지식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내가 팔에 뱀이 한 마리 기어 오르고 있는 채로 여기 들어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시다.
"여러분, 내 팔에서 꿈틀거리는 뱀이 보입니까?
이 시간에 들어오기 전에 방금 백과사전을 뒤져서 알아냈는데,
러셀의 독사로 알려진 뱀입니다. 물리면 난 삼십 초 이내에 죽습니다.
이놈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좀 알려 주시겠습니까?"
누가 이런 식으로 말해요? 나는 정보는 있지만 깨달음이 없는 거죠.
혹은 내가 술로 나 자신을 망치고 있다고 합시다.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라면
깨달음이 없는 사람이죠. 자신을 망치고 있다는 걸 알지만 그걸 깨달은 건 아닙니다.
깨달았다면 그 순간 중독을 떨쳐 버렸겠죠.
내가 그 뱀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면 내가 그걸 내 팔에서 떼어내지 않았겠죠.
'그것이 나를 통해서 떨어져 나갔겠죠.' 이것이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말하려는 변화입니다.
자기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게 아닙니다. '내가 나를' 변화시키는 게 아닙니다.
변화가
자기를 통해서,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이것이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자기 안에서, 자기를 통해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보이는 거죠.
깨달음 속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거죠.
'자기'가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하고 있다면 그건 나쁜 징조죠.
오래 가지는 못하겠죠. 만일 오래 간다면 그 사람은 매우 완고한 사람이겠고
따라서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하겠죠.
자기 혐오와 자기 불만을 토대로 회개한 사람들은 더불어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누군가가 "순교자가 되고 싶거든 성인과 결혼하라" 했죠.
그러나 깨달음 속에서는 부드러움·자상함·점잖음·개방성·유연성을 유지하면서,
밀어붙이지 않으면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내가 시카고에서 심리학을 공부할 적에 한 사제가 우리들에게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사실 나는 필요한 모든 지식을 갖고 있었죠. 술이 날 죽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또, 정말이지 아무것도 - 심지어 아내나 아이들의 사랑까지도 -
알코올 중독자를 고치지는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나도 처자식들을 사랑하지만 그것도 나를 고치지는 못하죠.
그러다가 어느 날 나는 나를 바꾸어 놓는 한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가랑비가 내리던 그 날 나는 도랑 속에 누워 있었습니다.
나는 눈을 떴고 이것이 날 죽이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난 그걸 보았고 그 후로는 단 한 방울도 입에 대고 싶은 욕구가 없었습니다.
사실은 그 후에도 좀 취한 적마저 있지만 건강을 해칠 정도로 마신 적은 없어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죠. 지금도 그럴 수가 없고요."
이것이 내가 말하려는 것입니다.
깨달음, 지식이 아니라 깨달음이죠.
담배를 지나치게 피우는 버릇이 있던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사실 담배에 관한 별의별 농담들이다 있지.
담배가 사람을 죽인다고들 하지만 고대 이집트인들을 보라구.
아무도 담배를 안 피웠는데도 모두 죽었잖은가." 그런데 어느 날 그는 가슴이 답답해져서
봄베이에 있는 암 연구소엘 갔는데, 의사가 말했죠. "신부님의 허파에 얼룩이 두 군데 있군요.
암일 수도 있으니 다음 달에 꼭 다시 오셔야겠습니다." 그 후로 그는 담배를 건드리지도 않았습니다.
전에는 흡연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던' 것이고, 이제는 그걸 '깨달은' 것이죠.
그게 다른 겁니다.
우리 수도회의 창시자인 이냐시오 성인은 이 점을 잘 표현했습니다.
진실을 맛보고 느끼는 것 - 아는 것이 아니라 맛보고 느끼는 것, 느낌을 얻는 것 - 이라고 불렀죠.
느끼게 될 때 달라집니다. 머리로 알 때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 앤소니 드 멜로 신부 -
....................................................................
내 안의 다른 나와의 전투에서의 패배는
사는 게 힘들게 느껴지게도 하고
사는 게 아무 의미 없게도 만들고
우울의 나락으로 밀어 넣기도 하고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 조차 없는 무기력한 인간으로 만들기도 하고
심지어 내 자신을 혐오하게도 만들죠.
바로 이것이 지식이 가져다 주는 속임수죠.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이사야40:31)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